퇴사한 지인이 책을 냈다. 그녀의 두 번째 저작, <회사 그만두고 어떻게 보내셨어요?>. 구매 지분의 3분의1 정도는 의리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부분은 그녀의 글맛, 그리고 주제 자체였다. 이제 입사 16년차, 사십줄로 접어든 지도 이미 몇 해가 지난 내 앞에 놓인 주제, 퇴사. 온라인 서점에 풀리자마자 바로 주문했다. 그리고 새해의 첫 책으로 삼았다. 올해 첫 책, XX미스틱, 성공적. 카페에 앉아 세 시간 만에 다 읽어냈다. 집으로 돌아와 술 한 잔 걸친 채 알딸딸하게 남기는 개인적인 감상.
주문 버튼을 클릭하면서 생각했지만, 내가 책 제목과 같은 질문을 받게 될 시기는 빨라도 15년 후가 될 것이다. 나는 이직을 할 지언정 절대로, 15년 이내에는 목적지 없는 퇴사를 할 수 없다. 혹시 모르겠다. 로또 1등이라도 맞게 된다면. (근데 로또를 안 사잖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첫 에피소드부터 내 마음을 확 잡아끌었다. 퇴사 후 현재 내가 관심있는 분야로 진출한 분의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아가는 여정. 사실 내 직장생활의 첫 위기 때 마음을 다잡게 해 주었던 것은 와인이었다. 입사 4년만에 처음으로 사람에 대한 실망을 겪었다. 그리고 퇴사를 결심했지만 결국 남은 것도 사람 때문이었다. 그 무렵에 사내 와인 동호회 와이니를 만들었다. 호기심이 커지면서 닥치는 대로 와인 서적을 읽었고 여름 휴가 비용을 와인강의를 듣는 데 사용했다. 더 깊이 들어가고 싶은 마음에 와인21 객원기자에 지원했다. 덕분에 수많은 인연을 만났고 좋은 경험을 쌓았다. 소진되던 삶의 에너지가 다시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은 근심의 가운데에 와인이 있다. 당장 할 수 없는 것들을 원하게 되고, 저 멀리 달려가는 사람들과 나를 비교하게 된다. 가슴에 쌓이는 번뇌는 일상을 지루하게 만들고 긍정적인 생각과 상식적인 행동을 가로막는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열 가지 에피소드의 주인공들도 각자 다른 번뇌를 쌓고 있었다. 그들이 퇴사를 결심한 계기나 과정, 이후의 행동이나 결과도 모두 달랐다. 하긴, 어떤 사람이 서로 같을까. 하지만 결국 자신의 길을 찾아갔다. 살아 있으니까, 살아야 하니까. 아직 모두가 현재진행형이다.
어이없게도 다 읽은 후에 가슴에 남은 문장은 '탈덕의 에너지는 어딘가로 옮겨간다'는 것이다. 모두가 자신의 내면에 에너지의 단초, 근원을 가지고 있다. 뭔가에 쏟았던 에너지는 사라지지 않는다. 에너지 불변의 법칙이다. 게다가 탈덕은 자발성이다. 내 스스로 결정하는 것. 내가 와이니를 만들면서 한 생각과도 동일하다. 억지로 동호회를 유지하려고 할 필요는 없다. 모두가 힘들어지면, 이제 그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그만하면 된다. 그래도 함께 했던 즐거운 추억, 관계, 사람은 남는다. 회사도 더이상 다니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그만둘 때다. 나는 아직 그 때를 만나지 못했다. 와이니처럼.
퇴준생. 퇴직을 준비한다는 의미 뿐만 아니라 퇴직 후를 준비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 나의 퇴직이 언제일지 아직 모르겠지만, 열심히 준비하는 퇴준생이 되어야지. 자발적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책임감은 최소화하고 모험심은 최대한 올려서. 좋아하는 것을 찾아가는 여정에 대한 밑그림을 그리자. 덕심과 에너지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움직일 뿐이다.
개인 척한 고냥이의 [와인저장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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