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21의 요청으로 시작한 부르고뉴 연재. 원래는 1분기 내로 끝낼 생각이었는데, 다른 프로젝트로 인해 끊임없이 늘어지고 있는 중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애정하는 와인 생산지이지만 끊임없이 치솟는 가격 때문에 자주 접할 수 없는 애증의 지역이 바로 부르고뉴다. 첫 편은 그런 상황에서 주머니가 가벼운 나 같은 애호가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에 대한 생각을 염두에 두고, 부르고뉴 레지오날(regional)을 중심으로 적은 시리즈의 첫 번째 글.
원문은 wine21.com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본 포스팅은 작성자 본인이 저장용으로 스크랩한 것입니다.
부르고뉴 : (1) 개괄, 그리고 변방의 북소리
로마네 꽁띠(Romanee-Conti), 몽라쉐(Montrachet), 르루아(Leroy), 쥬브레 샹베르땅(Gevrey-Chambertin)... 부르고뉴(Bourgogne)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아마도 위대한 그랑 크뤼나 명성 높은 생산자, 혹은 유명한 마을 이름 정도가 순위권에 들 것이다. 대부분 안드로메다에 가 있어 쉽게 영접할 수 없거나, 최소 수표 한 두 장은 쥐고 있어야 손에 넣을 수 있는 와인 혹은 그 와인이 나오는 곳들 말이다. 이런 점이 와인 애호가들의 머릿속에 '부르고뉴 = 비싼 와인'이라는 공식을 깊이 각인시킨다. 지역도 한정적이다.일반적으로 애호가의 인식 속에 자리 잡은 부르고뉴는 꼬뜨 드 뉘(Cotes de Nuits)와 꼬뜨 드 본(Cotes de Beaune)으로 구성된 소위 '황금 언덕(Cote d'Or)'의 특급 밭들에 국한된 경우가 많다. 기껏 추가한다 해도 샤블리(Chablis) 정도. 아랫동네인 꼬뜨 샬로네즈(Cotes Chalonnaise)와 마꼬네(Maconnais)는 제대로 취급도 못 받는다.
하지만 부르고뉴의 세계는 그런 럭셔리한 분위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남북으로 길이 230km, 포도밭 면적 3만 ha에 이르는 광대한 부르고뉴가 그렇게 단순하고 편향되었을 리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앞으로 몇 편의 글을 통해 부르고뉴 전체를 개괄하려 한다. 심오하게 들어가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하지만 짚어야 할 부분은 꼼꼼하게 짚고 넘어갈 것이다. 이번 글은 부르고뉴 AOC 등급 체계와 지역에 대한 소개다. 체크 포인트는 가성비 좋은 와인을 찾기 위해 주목할 만한 AOC들. 일상 속에서 즐길 수 있는, 최소한 일주일에 한 병 정도는 맘 편하게 오픈할 수 있는 그런 와인이 많이 보이는곳 말이다.
AOC(AOP) 등급 체계
부르고뉴는 단순하다. 최소한 품종 면에서는. 대부분 레드는 피노 누아(Pinot Noir), 화이트는 샤르도네(Chardonnay) 단일 품종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가메(Gamay)나 알리고떼(Aligote), 소비뇽 블랑(Sauvignon Blanc) 등도 쓰이지만 그 합이 10%를 넘지 못한다. 하지만 부르고뉴는 전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와인 생산지로 손꼽힌다. 그 복잡함을 만든 것은 바로 떼루아(Terroir)라는 쉽게 정의하기 어려운 개념. 말하자면 토질, 지형, 고도, 기후, 일조량 등 자연환경과 포도밭을 일궈 온 인간의 노력과 역사, 그리고 그 안에서 찾아낸 최적 품종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조화랄까. 떼루아를 중심으로 형성된 부르고뉴의 복잡함과 심오함은 프랑스 고급 와인의 양대 산맥으로 거론되는 보르도(Bordeaux)를 훌쩍 뛰어넘는다. AOC와 별개로 샤토(Chateau) 별 등급을 매긴 보르도와 달리, 부르고뉴는 밭 자체에 등급을 부여하고 그 등급을 아펠라시옹 규정(AOC)에 반영했다.
명확한 피라미드 구조의 최상단에 그랑 크뤼(Crand Cru) AOC 33개가 위치하고 있다. 그다음은 44개의 빌라주(Village) AOC인데, 현실적으로 프르미에 크뤼(Premier Cru)와 일반 빌라주로 구분된 2단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다. 가장 아래를 받치고 있는 것은 레지오날(Regional) AOC로 전체 생산량의 50%를 살짝 넘는다. 레지오날 AOC는 성격에 따라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아펠라시옹 규정에 따라 부르고뉴 뒤에 생산 지역이나 마을, 포도밭 명 등을 명기하는 카테고리다. 부르고뉴 꼬뜨 생 자크(Bourgogne Cote Saint-Jacques), 부르고뉴 오뜨 꼬뜨 드 뉘(Bourgogne Hautes-Cotes de Nuits), 부르고뉴 꼬뜨 도르(Bourgogne Cote d'Or) 등이 이에 해당한다. 두 번째는 품종이나 양조 방법 등 생산 조건에 따라 특별히 규정한 카테고리다. 부르고뉴 알리고테(Bourgogne Aligote), 꼬또 부르기뇽(Coteaux Bourguignons), 부르고뉴 빠스뚜그랭(Bourgogne Passe-tout-grains), 크레망 드 부르고뉴(Cremant-de-Bourgogne) 등이 이에 속한다.
가성비 좋고 즉각적인 만족감을 주는 와인을 찾는 사람이라면 특히 두 번째 카테고리에 주목하는것이 좋다. 꼬또 부르기뇽은 부르고뉴 그랑 오디네르(Bourgogne-Grand-Ordinaire)를 대체하기 위해 2011년 탄생한 AOC인데, 보졸레를 포함한 부르고뉴 전역을 커버한다. 부르고뉴에서 재배가 허용된 포도 품종이라면 거의 다 사용할 수 있고, 단일 품종으로도 블렌딩으로도 양조 가능하다. 레드, 화이트, 스파클링 등 스타일도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 자유도가 높다 보니 의식 있는 생산자들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어 잘만 고른다면 제법 흥미로운 와인을 만날 수 있다. 부르고뉴 빠스뚜그랭은 좀 더 확실하다. 생산자만 잘 고른다면 가성비를 떠나 절대적으로도 훌륭한 와인을 만날 수 있는데, 국내에 수입된 것들은 대체로 그렇다. 빠스뚜그랭은 최소 33% 이상의 피노 누아와 15% 이상 66% 이하의 가메를 중심으로 보조 품종을 15% 이하 블렌딩할 수 있다. 그런데 의외로 잘 만들기 어렵다. 특히 피노 누아와 가메는 각각 발효 후 블렌딩할 수 없고 블렌딩 후 발효해야 하기 때문에, 완숙 시기와 성격이 다른 두 품종의 수확 시기를 맞추고 함께 발효하는 것이 쉽지 않다. 하지만 수준급 생산자의 경우 꼬뜨 도르 지역에 올드 바인 가메를 보유하고 있거나, 가메에 최적인 화강암 토양에서 재배한 가메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 제법 품질이 좋다. 그렇다면 크레망 드 부르고뉴는? 부르고뉴에서 전통 방식으로 만든 스파클링 와인을 샴페인의 절반 값에 살 수 있다면 시도해 볼 만 하지 않은가. 카바(Cava)와 샴페인 사이에서 나름 합리적인 절충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카테고리의 오뜨 꼬뜨(Hautes-Cotes)들도 주목해 볼 만 하지만, 이는 '꼬뜨 도르' 편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지역 별 생산지
지도를 보자. 욘(Yonne), 꼬뜨 도르(Cote d'Or), 손-에-루아르(Saone-et-Loire) 등은 데파르트망(departement)이라는 행정구역의 이름으로, 우리나라로 치면 시/군에 해당한다. 북서쪽의 욘에는 대표적 화이트 와인 산지인 샤블리(Chablis)가 자리잡고 있다. 7개의 그랑 크뤼와 40개의 프르미에 크뤼에서 재배한 샤르도네로 신선한 산미와 미네랄리티를 겸비한 와인을 만든다. 이외에 소비뇽 블랑(Sauvignon Blanc)과 소비뇽 그리(Sauvignon Gris) 품종으로 생기 넘치는 화이트 와인을 만드는 생 브리(Saint-Bris)와, 피노 누아 등으로 가벼운 레드 와인을 생산하는 이랑시(Irancy) 등 총 5개 마을이 있다. 샤블리를 제외한 다른 지역의 와인들은 국내에 일부 소개돼 있긴 하지만 쉽게 만나기는 어렵다.
꼬뜨 도르의 북쪽에는 샤티요네(Chatillonnais)라는 작은 산지가 있다. 이곳에서는 빌라주 급 와인은 생산하지 않고 크레망 등 레지오날 급 부르고뉴만 생산하기에 지역적인 존재감은 미미하다. 여기서 남동쪽으로 70km 정도 내려가면 디종 남쪽으로 본격적으로 '황금 언덕'이 펼쳐진다. 특히 위대한 레드 와인으로 명성 높은 꼬뜨 드 뉘에는 샹베르탱, 뮈지니(Musigny), 로마네 꽁띠 등 24개의 그랑 크뤼가 존재한다. 전체 33개 그랑 크뤼의 73%를 차지하는 압도적인 비중이다. 9개의 빌라주 또한 레드 와인으로 유명하며, 마을에 속한 프르미에 크뤼 중에는 그랑 크뤼 급 이상의 평가를 받는 곳도 많다. 꼬뜨 드 뉘가 레드라면 꼬뜨 드 본은 화이트다. 8개의 그랑 크뤼 중 화이트 와인만 생산하는 곳이 6개, 화이트와 레드를 함께 생산하는 곳이 1개다. 몽라쉐를 양분하고 있는 쀨리니(Puligny), 샤샤뉴(Chassagne) 마을을 비롯해 그랑 크뤼는 없지만 농밀한 와인을 생산하는 뫼르소 같은 마을도 화이트 와인으로 명성이 높다. 물론 볼네(Volnay), 뽀마르(Pommard) 같이 훌륭한 레드 와인을 생산하는 마을들이 레드와 화이트의 균형을 맞춘다. 24개의 빌라주에서 다양한 가격과 품질의 레드와 화이트 와인을 고루 생산하고 있다.
그 남쪽으로 꼬뜨 샬로네즈와 마꼬네가 이어진다. 알리고떼 품종으로 샤르도네 못지않은 고품질 화이트 와인을 생산하는 부즈롱(Bouzeron)과 프르미에 크뤼 포도밭을 중심으로 좋은 품질의 레드 와인을 생산하는 메르퀴레(Mercurey) 등 꼬뜨 샬로네즈의 5개 마을은 제법 명성을 얻고 있다. 마꼬네는 뿌이 퓌세(Pouilly-Fusse) 마을을 중심으로 가성비 좋은 화이트 와인 산지로 알려져 있다. 마코네에는 프르미에 크뤼가 없었는데, 푸이 퓌세의 22개의 클리마가 프르미에 크뤼로 최종 승인되면서 2020년 빈티지부터 프르미에 크뤼 와인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빌라주 이상 AOC의 개수를 지역 별로 정리한 표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다. 샤블리 그랑 크뤼는 7개 아닌가? 부그로(Bougros), 보데지르(Vaudesir), 블랑쇼(Blanchot), 발뮈르(Valmur), 그르누이으(Grenouilles), 레프뢰즈(Les Preuses), 그리고 레 클로(Les Clos). 맞다, 7개다. 그런데 왜 위 표에는 1개라고 되어 있을까. 샤블리의 경우 7개의 그랑 크뤼 포도밭을 샤블리 그랑 크뤼 AOC 하나로 규정했다. 레이블에는 각각의 포도밭 명칭을 표기하지만, AOC 명은 그냥 샤블리 그랑 크뤼(Appellation Chablis Grand Cru Controlee)다. 꼬뜨 도르의 그랑 크뤼들은 다르다. 포도밭의 명칭이 바로 그랑 크뤼 AOC 명칭이 된다. 예컨대 뮈지니 그랑 크뤼는 뮈지니 AOC(Appellation Musigny Controlee)다. 프르미에 크뤼는 별도의 AOC를 부여하지 않고 빌라주 AOC에 포함된다. 레이블에 포도밭 이름과 (경우에 따라서는 단독으로) 프르미에 크뤼(Premier Cru / 1er Cru) 명칭을 병기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랑 크뤼 이상의 명성을 자랑하는 프르미에 크뤼인 본 로마네의 크로 파랑투(Cros-Parantoux)도 AOC 명칭은 본 로마네(Appellation Vosne-Romanee Controlee)다.
일반적으로 등급이 높을 수록 품질이 좋다. 몇 세기 동안 선별된 지역이고 정리된 체계이니 그럴 만도 하다. 그만큼 가격도 비싸다. 포도밭이 세분화되어 희소성이 크니 이런 현상은 더욱 심화된다. 특히 훌륭한 생산자와 엮이게 되면 기하급수적으로 뛴다. 하지만 일반론일 뿐이다. 높은 등급의 와인은 무조건 좋고 낮은 등급은 무조건 저렴하냐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AOC가 법적으로 고정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부터다. 거의 한 세기가 지나는 동안 기후도, 기술도, 만드는 사람도 바뀌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다. 그런데 90년이나 흘렀으니 당시에는 별 볼일 없었던 곳이 현재는 큰 잠재력을 지닌 포도밭으로 변했을 가능성도 있다. 혹은 평범한 포도밭에 위대한 생산자가 최적의 재배기술과 양조법을 적용해 빼어난 와인을 생산할 수도 있다. 이는 시장 가격을 보더라도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다. 그랑 크뤼를 넘어서는 프르미에 크뤼, 빌라주 급을 넘어서는 레지오날 급 와인이 즐비하니 말이다. 그러니 아직 두드러지지 않은 지역 중에서도 보석 같은 와인들을 발견할 가능성은 충분하다. 꼬뜨 도르를 대표하는 생산자들부터 부지런히 그런 지역을 찾아 영역을 넓혀 가고 있으니까. 다음에는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는 지역, 그랑 크뤼는 없지만 갈수록 잠재력이 드러나고 있는 꼬뜨 샬로네즈와 마꼬네에 대해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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