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이날 인터뷰를 했던 알렉산드로 데 스테파니(혹은 그의 직원)로부터 메일이 왔다. 작년 연말의 그 만남이 너무 흥미로웠고 가능하다면 이탈리아의 자기 와이너리를 방문해 달라는 것. 와인뿐만 아니라 와인을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다는 얘기. 의례적인 인사이긴 하지만, 그래도 당시의 기억이 너무 따뜻해서 혹하는 마음이 들었다. 어떻게, 기회 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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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전통에 대한 자부심, 데 스테파니(De Stefani)
최근 서울 삼성동 한 음식점에서 이탈리아 북동부를 대표하는 와이너리 데 스테파니(De Stefani)의 소유주이자 와인메이커 알레산드로 데 스테파니(Alessandro De Stefani)를 만났다. 전날 와인 평론가 제임스 서클링(James Suckling)이 서울에서 주최한 '그레이트 와인즈 오브 이탈리아 2023(Great Wines of Italy 2023)'에 참석하느라 피곤했을 텐데도 그의 얼굴은 아주 밝았다. 편안한 분위기에서 그와 나눈 대화 속에는 가족에 대한 사랑과 와인에 대한 애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그는 브로셔를 열어 가족사진을 보여주었다. 4대를 이어 오는 가족 경영 와이너리의 자부심이 느껴졌다. 데 스테파니 가문의 기원은 이탈리아 베네토 지방의 작은 마을 레프론톨로(Refrontolo)에서 1624년 발견된 공식 문서에 기록돼 있다. 스테파니 가문의 옛 이름은 스테펜(Stèfen)이었다. 데 스테파니의 아이콘 와인의 이름이 '스테펜 1624(Stèfen 1624)'인 이유다. 와이너리의 역사는 1866년에 시작된다. 창립자는 알레산드로의 증조할아버지 발레리아노 데 스테파니(Valeriano De Stefani)다. 그는 코넬리아노(Conegliano)와 발도비아데네(Valdobbiadene) 사이의 언덕 지대에서 특별한 개성이 있는 와인을 생산할 수 있는 최상의 테루아를 발견했다. 대를 이은 할아버지 발레리아노(Valeriano De Stefani)는 할머니 안젤리나(Angelina)와 함께 와이너리의 기틀을 다졌다. 그들은 특히 품질에 대해서는 어떤 타협도 하지 않았다. 데 스테파니 전통의 시작이다.
아버지 티지아노 데 스테파니(Tiziano De Stefani)는 코넬리아노 대학(Oenological and Viticulture School of Conegliano)에서 포도 재배와 양조학을 전공했다. 그리고 베네치아 북동쪽 모나스티에르 디 트레비소(Monastier di Treviso)와 포살타 디 피아베(Fossalta di Piave)에 새로운 포도밭을 마련한다. 이 지역은 북쪽 돌로미티 알프스 산맥에서 유래한 독특한 토양을 지녔다. 또한 더운 여름에는 알프스 산맥으로부터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포도의 산미를 유지해 준다. 남쪽에 인접한 아드리아해와 함께 포도 재배에 최적 환경을 제공한다. 현재 소유주 알레산드로 역시 코넬리아노 대학에서 포도 재배와 양조를 공부했다. 경영 공부도 병행한 그는 와이너리의 규모를 확대함과 동시에 자연주의 철학에 따라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그는 40헥타르에 이르는 포도밭에서 연 30만 병 이하의 낮은 생산량을 유지하고 있다. 와인의 개성, 그리고 품질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보유한 포도원에 대해 소개하던 알레산드로는 대문호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데 스테파니의 인연을 언급했다. 미군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헤밍웨이는 1918년 심각한 부상을 입었는데, 그때 그를 치료해 준 곳이 바로 데 스테파니 와이너리였던 것이다. 알레산드로는 “헤밍웨이의 부상을 말끔하게 치료할 정도로 우리 와인이 영험하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당시의 경험은 헤밍웨이가 대표작 <무기여 잘 있거라>를 집필하는 데 큰 영감을 줬다.
데 스테파니는 개성적인 토양과 미세 기후를 갖춘 자가 소유 포도원에서 지역의 특성과 전통을 표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포도밭의 식재 밀도는 헥타르당 8400그루 정도로 상당히 높다. 포도나무끼리 경쟁하며 뿌리를 깊게 내리기 때문에 테루아의 특성을 오롯이 반영한다. 포도나무의 평균 수령은 40년이며, 20년 이하 수령의 포도는 와인에 사용하지 않는다. 포도밭에는 화학 비료나 제초제 등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포도는 손으로 세심히 선별해 수확하며, 가까운 양조장으로 빠르게 운송해 손상을 최소화하고 풍미를 완벽하게 살린다. 이런 포도를 사용하니 좋은 와인이 나올 수밖에 없다.
알레산드로는 포도밭 관리, 특히 가지치기(pruning)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포도 수확도 물론 중요하지만 기간이 비교적 짧고 교육도 쉬워 크게 부담스럽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가지치기는 마치 '건물을 짓는 것과 비슷' 하기 때문에 12월부터 4월까지 5개월 동안이나 빈틈없이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노하우도 중요해 전문 교육을 받고 오랜 경험을 쌓은 소수의 직원들이 도맡아 진행한다. 매년 전문학교의 인원을 초빙해 교육도 진행한다.
와인 양조는 '셰프의 요리'에 비유했다. 일단 양질의 포도가 필수적이지만, 와인메이커가 어떤 재료를 사용하고 특정 상황에서 어떻게 판단하는지 또한 중요하다는 것이다. 특히 숙성에 대해 힘주어 이야기했다. 데 스테파니는 대표적 오크 산지 프랑스 알리에(Allier) 중에서도 가장 질 좋은 오크를 생산하는 트롱셰(Tronçais)산 오크통만 사용한다. 최소 200년 수령의 오래된 참나무로 만든 널빤지만 사용하는데, 40개월 동안 옥외에서 건조하며 시즈닝(seasoning)을 한다. 이런 나무를 사용하면 재질이 촘촘해 와인이 천천히 우아하게 숙성된다. 알레산드로는 “와인은 오크통에서 산화(oxidation)되는 것이 아니라 미세 산소포화(micro oxygenation)되는 것”이라며 이를 위해서는 양질의 오크통을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재차 강조했다. 데 스테파니는 오크통을 3년 이상 사용하지 않으며, 아이콘급 와인의 경우 새 오크통만 사용한다.
함께 마신 첫 와인은 화이트 와인 올메라 2021(OLMÈRA 2021). 과거에는 토카이(Tocai)라고 불렀던 프리울라노(Friulano) 60%와 소비뇽 블랑(Sauvignon Blanc) 40%를 사용해 양조했다. 프리울라노는 보트리티스(botrytis)의 영향을 가볍게 받아 복합적인 풍미를 더한다. 올메라는 크리오익스트랙션(cryoextraction)이라는 독특한 방식을 적용해 양조한다. 포도가 가볍게 어는 수준인 -5°C 정도의 온도에서 4~5일 포도를 침용하는 방식으로, 이 과정에서 껍질의 성분들이 와인에 더 잘 녹아든다. 또한 수분은 얼어 있는 상태에서 빙점이 낮은 당분과 풍미 요소들을 더욱 많이 추출할 수 있다. 이는 신선한 화이트 와인에는 포도를 말리는 아파시멘토(appassimento) 방식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해 2년 전부터 양조 방식을 변경한 것이다. 이후 프리울라노는 프렌치 오크에서, 소비뇽 블랑은 시멘트 탱크에서 1년 동안 숙성한 후 병입하여 추가 1년 숙성한다. 덕분에 유자처럼 쌉싸름한 산미와 세이버리한 풍미, 소금 같은 미네랄 힌트가 깔끔하게 어우러진다. 복합적인 풍미와 은은한 오크 뉘앙스, 탄탄한 구조가 매력적인 와인으로 당장 마셔도 좋지만 20년 이상의 숙성 잠재력도 지니고 있다.
두 번째는 레드 와인 솔레르 2020(SOLÈR 2020). 메를로(Merlot) 35%, 카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 25%, 카르미네르(Carmenere) 15%, 레포스코(Refosco) 10%, 마르제미노(Marzemino) 10%로 양조했다. 솔레르는 베네토 사투리로 '다락방'이라는 의미로, 최고의 포도를 말리는 곳으로 사용되던 곳이다. 솔레르는 약간의 메를로와 레포스코, 마르제미노 등 약 30%의 포도만 건조해 사용하며, 나머지 포도는 전통적인 양조 방식을 따른다. 온도 조절 탱크에서 발효한 후 오크 바리크에서 1년, 병입 후 1년 숙성한다. 스파이스 & 허브 힌트와 붉은 자두, 라즈베리, 검은 체리 풍미가 매끄러운 질감을 타고 편안하게 드러나며, 가벼운 스위트 뉘앙스가 신선한 산미와 함께 매력적인 피니시를 선사한다. 전문가와 와인 애호가를 모두 만족시키는 와인이다. 참고로 데 마르티노의 레드 와인들 또한 화이트 와인처럼 산뜻한 와인을 선호하는 고객 취향에 맞춰 미세 조정을 하고 있다. 양조 방식은 거의 변화가 없지만, 아파시멘토 시 건조 기간을 절반으로 줄이고 대신 병 숙성을 더욱 길게 한다는 것이다.
말라노테 2017(MALANOTTE 2017)은 피아베 지역의 토착 품종인 라보소(Raboso) 100%로 만든 싱글 빈야드 와인이다. 생산지역인 말라노테 델 피아베(Malanotte del Piave)는 2010년 DOCG로 지정되었다. 라보소는 지역 방언으로 '화났다'는 의미인 'rabioso'에서 파생된 이름인데, 워낙 강건하고 타닌이 많은 품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보소는 '와이너리 닥터'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다. 시들어가는 와인에 10%만 첨가해도 타닌과 산미를 더하며 살려 내기 때문이다. 완숙한 포도만 선별 수확해 30% 정도만 아파시멘토를 진행한다. 온도 조절 탱크에서 주기적으로 펌핑 오버(pumping over)를 진행하며 침용한 후, 주스만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로 옮겨 발효를 마무리한다. 이후 프렌치 바리크에서 36개월, 병입 후 18개월 발효한다. 낙엽, 부엽토, 월계수 허브, 온화한 스파이스 힌트와 동물성 뉘앙스 등 복합적인 풍미가 다층적으로 드러난다. 입에서는 오묘한 미네랄과 짭조름한 풍미와 조화를 이루는 신맛이 긴 여운을 선사한다. 언뜻 네비올로(Nebbiolo) 품종을 떠올리게 하지만 확연히 다른 개성이 느껴지는 와인이다. 과거 이 지역 사람들은 아이가 태어나면 해당 빈티지의 라보소 와인을 아이의 결혼식을 위해 보관했다고 한다. 20년은 물론 30년 이상의 숙성 잠재력을 지닌 와인이라는 얘기다. 데 스테파니 와이너리에서는 말라노테를 '왕'이라고 부른다.
말라노테가 왕이라면 스테펜 1624(STÈFEN 1624)는 '보석'이다. 콜리 디 코넬리아노(Colli di Conegliano DOCG) 지역에 있는 싱글 빈야드에서 재배한 마르제미노 100%로 양조한다. 스테파니 가문의 옛 이름을 딴 이 와인은 포도를 말려 와인을 양조하는 지역 전통에 대한 경의를 담고 있다. 스테펜 1624 2016년 빈티지는 생리적으로 완전히 숙성한 포도를 수확해 자연스럽게 말린 후 최상의 포도알만 골라 파쇄한다. 천천히 침용하며 발효하다가 포도즙이 충분히 풍미 요소들을 흡수하면 프렌치 바리크로 옮겨서 36개월, 병입 후 18개월 숙성한다. 향긋한 바이올렛 향기, 검붉은 체리와 베리의 방순한 풍미, 정향과 시나몬 캔디 같은 스위트 스파이스가 격조 높게 드러난다. 드라이한 미감과 견고한 구조에도 불구하고 전혀 부담스럽지 않으며, 온화하고 편안한 목 넘김을 선사한다. 과연 보석 같은 와인으로, 빈티지로부터 50년까지도 숙성할 수 있다. 물론 그때까지 참을 수 있다면 말이다.
와인도 생산자를 닮는 걸까. 데 스테파니의 와인들은 하나 같이 친근하면서도 품격을 갖추고 있었다. 바로 마셔도 좋고, 충분한 숙성 후에 즐겨도 좋을 와인들이다. 깊어가는 겨울, 데 스테파니 와인들과 함께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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