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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공부/와인21 기고

article 153. 스페인의 전설, 마스 라 플라나 그리고 미구엘 토레스

by 개인 척한 고냥이 2016. 10. 3.

"토레스는 배반을 하지 않는다."

몇 년 전 부터 꾸준히 밀고 있는 워딩.


이 정도의 대량 생산을 하는 와이너리가 이렇게 꾸준히 훌륭한 품질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다.

게다가 사회와 환경까지 생각하는 그들의 철한 또한 훌륭.

정정한 모습으로 처음부터 참석자에 대한 예의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서서 발언했던 미겔 토레스 씨.

그에게 존경과 감사의 박수를 보낸다... 부디 오래오래 건강하게 좋은 와인 만들어 주시길.




스페인의 전설, 마스 라 플라나 그리고 미구엘 토레스


[<고미요>에 소개된 1979년 파리 와인 올림피아드 결과(출처: 신동와인)]

 

토레스 마스 라 플라나(Torres Mas La Plana)는 검은 전설(Legend in Black)로 불린다. 이 별명은 1979년 미식 권위지 <고미요(Gault-millau)>가 개최한 파리 와인 올림피아드(Paris Wine Olympiad)에서 유래했다. 와인 레이블을 가린 채로 진행된 이 대회에서 마스 라 플라나 1970년 빈티지가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프랑스인으로 구성된 심사위원들이 샤토 라뚜르(Château Latour) 등 쟁쟁한 와인들 사이에서 마스 라 플라나를 선택한 것은 놀랄 만한 사건이었다. 당시만 해도 카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 품종을 거의 생산하지 않았던 스페인에서 온 신생 와인이 보르도 그랑 크뤼(Bordeaux Grand Cru) 위에 군림한 것이기에 그 의미는 더욱 특별했다. 특징적인 검은 레이블은 전설이 되었고, 이후 <디캔터(Decanter)>, <와인 애드버킷(Wine Advocate)>, <와인 스펙테이터(Wine Spectator)> 등 주요 와인 전문지에서 지속적으로 호평을 받으며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마스 라 플라나가 2010년 빈티지로 탄생 40주년을 맞았다. 이를 기념하여 토레스 와이너리의 소유주 미구엘 토레스(Miguel Torres) 씨가 한국을 찾았다. 그는 자타 공인 와인업계의 거물. 2002년 <디캔터> 선정 올해의 인물(Man of the Year)이며, 2011년엔 전 세계 와인업 전반을 아우르는 파워 리스트(The Power List) 18위에 올랐다. 그가 이끄는 토레스는 1870년부터 5대에 걸쳐 이어 온 가족 경영 와인 그룹이다. 현재 스페인을 기반으로 칠레, 미국에도 진출하여 2,400ha가 넘는 포도밭을 소유하고 있다. 2014년 기준 매출액은 2억4천만 유로(약 3,168억 원)에 달하며 전 세계 150개 국에 와인을 수출하고 있다. 토레스는 마스 라 플라나 등 프리미엄 와인은 물론 생산 와인 전반에 걸쳐 높은 품질과 수려한 스타일을 유지하고 있다. 게다가 고급스러운 레이블과 합리적 가격까지 갖추어 인기가 높다. 서울 신라호텔에서 미구엘 토레스 씨와 함께 마스 라 플라나 등 토레스의 대표적인 와인들을 시음할 수 있는 뜻깊은 기회를 가졌다.

 


[토레스 와이너리 소유주 미구엘 토레스 씨]

 

150년에 이르는 긴 세월 동안 전 세계 와인 애호가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아온 토레스. 토레스 씨는 그 기반를 가족경영에서 찾았다. ‘훌륭한 와이너리 중에는 가족경영의 역사와 전통을 가진 경우가 많다’며 가족경영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토레스는 샤토 무통 로칠드(Château Mouton Rothschild), 베가 시실리아(Vega Sicilia) 등 세계 유수의 가족 경영 와이너리 11곳이 소속된 PFV(Primum Familiae Vini)의 창립 멤버이기도 하다. 그가 꼽은 가족경영의 가장 큰 장점은 장기적 관점의 투자와 운영. 예컨대 일반기업이라면 주주/투자자 등 이해관계자의 압력에 의해 단기간에 성과를 내야 하고 이를 위해 품질 등을 타협하기 쉽다. 하지만 가족경영이라면 출혈을 감수하더라도 품질이 나쁘면 아예 해당 빈티지에는 와인을 만들지 않는 극단적인 결정도 가능하다. 지금 당장 보다는 미래를 내다보는 것이다.

 

실제 토레스는 매년 이익의 95% 이상을 재투자하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지구 온난화 등 당장 급한 것은 아니지만 장기적으로 중요한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한다. 다음 세대를 위해 피레네 산맥 부근 등 고도가 높고 서늘한 지역에 포도밭을 조성하고 있다. 근원적 환경 개선을 위한 투자 또한 적극적이다. 이미 기후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1,000만 유로 이상을 투자했다. 태양열을 활용해 가스 소비와 이산화탄소 발생을 최소화하고 수자원 또한 최적화하여 사용한다. 스페인과 칠레에 2000ha 에 가까운 숲을 조성한 것 또한 같은 맥락이다. 토레스 씨는 아들이 경영에 참여할 때 ‘수익의 11%는 친환경 사업에 투자하라는 조항을 넣었다’며 환경을 보존하는 일은 좋은 와인을 만드는 데는 물론 다음 세대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말 뿐만 아니라 그 스스로 매사에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인다. 일례로 그의 자동차는 도요타 프리우스. 소유주이자 회장의 지위임에도 이산화탄소 배출이 적은 소형 하이브리드 자동차를 선택한 것이다.

 

인간존중 또한 토레스에서 내세우는 가치 중 하나다. 토레스는 가족과 1,300여 명의 직원, 고객과 지역사회에 대한 기여 등을 브랜드 DNA에 명시해 놓았다. 토레스 재단을 운영하며 세계 곳곳에서 병원 건립이나 재난 구제 등 공익 활동을 펼치고 있다. 2010년 칠레 대지진 때는 36채의 집을 지어 재난을 당한 사람들에게 기부했으며, 중국, 인도 등 세계 각지에 학교를 세웠다. 영국 전문지 드링크 인터내셔널(Drinks International)이 2014년에 이어 2015년에도 ‘세계에서 가장 존경 받는 와인 브랜드(World’s Most Admired Wine Brands)’로 토레스를 선정한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는 셈이다. 단지 좋은 와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가치를 그 안에 담아내는 생산자가 바로 토레스다. 

 

토레스는 칠레에 가장 먼저 진출한 해외 와이너리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슬픈 사연이 얽혀 있다. 스페인 내전 중이었던 1939년 와이너리가 파괴되고 아버지가 살해당할 뻔 했던 것. 아버지는 그 충격으로 해외 진출을 신중히 고려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실행은 3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뒤에야 이루어졌다. 1970년대 초 칠레를 방문하여 그 잠재력을 확인한 후 1979년 비로소 와이너리를 설립했다. 당시 칠레가 피노체트 군부 독재 치하였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결국 해외 진출을 결정한 데는 과거의 아픈 경험보다는 그들의 선구자적 도전 정신이 더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칠레에서는 만소 데 벨라스코(Manso de Velasco)를 비롯한 다양한 와인들이 생산되고 있다. 칠레보다 1년 앞선 1978년에는 미국 소노마 밸리(Sonoma Valley)에도 진출해 마리마 에스테이트(Marimar Estate)를 운영하고 있다.

 

 

토레스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는 역시 마스 라 플라나다. 적절한 수분이 유지되는 자갈 섞인 석회질 토양으로 구성된 29ha 규모의 포도밭에는 50-60년 수령의 카베르네 소비뇽이 식재되어 있다. 토레스 가문이 거주하는 주택 또한 포도밭 내에 위치해 있으니 명실상부 토레스의 심장인 셈이다.  

 

마스 라 플라나의 명성은 거듭된 혁신 속에서 탄생했다. 생산 초기엔 지역 양조 전통에 따라 2주 정도의 짧은 침용(maceration) 기간을 거쳐 아메리칸 오크에서 숙성했다. 1981년부터는 비료 사용을 중지하고 그린 하비스트(green harvest)를 실시하여 포도 생산량을 줄이고 품질을 끌어올렸다. 또한 침용기간을 4-5주 수준으로 늘리고 프렌치 오크통을 도입했다. 1990년 이후로는 100% 프렌치 오크만 사용한다. 이외에도 포도밭과 셀러 두 번에 걸쳐 수작업으로 최고의 포도를 선별한다. 숙성용 배럴 또한 다섯 종류의 오크에서 숙성한 와인을 블라인드 테이스팅하여 최적의 것을 선정한다. 오크는 물론 코르크도 과학적 분석을 통해 위생과 품질이 검증된 것만 사용한다. 이렇게 철저한 관리를 거쳐 숙성된 와인들은 최종 테이스팅을 거친다. 품질이 충족된 와인만 마스 라 플라나에 사용하며 만족스럽지 않은 것은 그랑 코로나스(Gran Coronas)로 강등한다. 이렇듯 세계 최고를 향한 집요한 노력은 버티컬 & 벤치마크 테이스팅(vertical & benchmark tasting)에서도 드러난다. 세계의 유명 와인평론가와 소믈리에 등을 초청하여 마스 라 플라나의 여러 빈티지와 보르도 1등급 와인들을 비교 테이스팅 하여 그 품질을 가늠하는 것이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이러한 노력이 오늘의 토레스를, 마스 라 플라나를 만들었다.

 

[마스 라 플라나 포도밭 전경(출처: 신동와인)]

 

70이 넘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모든 질문에 서서 대답하는 성실함과 특유의 위트가 인상적이었던 미구엘 토레스 씨. 한국의 와인애호가들에게 ‘와인은 기쁨을 주어야 존재 의미가 있다’며 음식과 함께 편하게 즐길 것을 당부했다. 초심자들의 경우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자신의 입맛에 맞는 와인을 찾는 것이 좋다는 말도 덧붙였다. 취향에 맞는 와인을 찾아가다 보면 아마 그 길 어딘가에서 스페인의 전설 토레스 와인이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미구엘 토레스 씨와 함께 즐겼던 와인들을 간단히 소개한다.

 

Miguel Torres, Cordillera Brut NV Curico Valley

토레스가 칠레에서 손수확한 피노 누아 100%로 양조하는 스파클링 와인. 전통방식으로 양조하여 18개월의 병 숙성을 거친다. 은은한 이스트 향이 감도는 생생한 과일 맛과 단단한 구조감이 인상적이다.

 

Marimar Estate, La Masia Chardonnay 2013 Russian River Valley
미구엘 토레스 씨의 여동생인 마리마 토레스 씨가 소유한 마리마 에스테이트에서 만드는 샤르도네. 가벼운 바닐라, 버터리 & 너티 아로마. 입에서는 잘 익은 핵과, 열대과일의 달콤한 풍미와 균형을 맞추는 개운한 산미가 느껴진다. 은근한 여운이 매력적인 유럽풍의 미디엄풀 바디 화이트.

 

Torres, Celeste 2012 Ribera del Duero

검붉은 베리와 체리, 가벼운 스파이스와 허브 향기. 명확한 타닌과 신선한 과일 풍미로 생동감이 넘친다. 미디엄 바디이지만 구조감이 훌륭하다. 섬세하게 온도를 맞추기 위해 아이스 버킷에 칠링 후 와인을 낸 세심한 배려가 돋보였다. 틴토 피노(Tinto Fino, Tempranillo의 다른 이름) 100%로 양조한다.

 

Torres, Salmos 2012 Priorat

도드라지는 남불 허브, 자두, 레드 베리, 약간의 스모키 힌트. 과하지 않게 드러나는 완숙 과일의 풍미에 쫀쫀한 타닌과 짭쪼롬한 피니시가 더해진다. 미네랄을 동반한 긴 여운이 아름답다. 점판암(slate) 토양의 구릉지 포도밭에 식재된 50-60년 고목에서 수확한 까리녜나(Cariñena=Carignan), 가르나차(Garnacha), 시라(Syrah)를 블렌딩했다.

 

 

이어서 1989년, 1996년, 2010년 세 빈티지의 마스 라 플라나가 제공되었다. 20여 년의 세월 동안 레이블과 내용물의 특징은 조금씩 변했지만 그 품격과 자부심만은 전체를 관통하고 있었다. 카베르네 소비뇽 100%로 양조한, 절제된 세련미와 중용의 도를 느낄 수 있는 와인이다.

 

Torres, Mas La Plana 2010 Penedès
매콤한 스파이스, 블랙커런트, 붉은 자두와 라즈베리 아로마, 시원한 허브, 모카 힌트. 검은 베리 풍미가 벨벳처럼 부드러운 타닌과 함께 말끔한 미디엄풀 바디를 타고 전해진다. 코에서의 즐거움이 입으로 전해지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 2010년은 비가 많고 평년보다 낮은 기온을 보였다. 덕분에 예년에 비해 조금 낮은 알코올 농도를 보이며 산미 또한 훌륭하다.

 

Torres, Mas La Plana 1996 Penedès
커피, 칡, 감초, 가벼운 부엽토 힌트 등이 우아한 부케를 형성한다. 블랙커런트, 붉은 베리 등 과일 풍미가 또렷하진 않지만 존재감을 드러내며 시나몬, 정향 등이 복합미를 더한다. 20년이 지났지만 아직 생생한 여운이 남아있다. 1996년은 과도기적 빈티지로 우아한 타닌과 과일맛이 도드라지는 스타일이라고 한다.

 

Torres, Mas La Plana 1989 Penedès
시가, 담배, 버섯, 해초, 시나몬, 동물성 뉘앙스 등으로 한층 깊어진 부케에 매콤한 향기가 얹혀 있다. 어찌 생각하면 잘 익은 간장 같은 느낌도. 과일맛은 상당 부분 잦아들었지만 아직 생명력이 느껴진다. 둥근 타닌과 12.5%라는 클래식한 알코올 도수가 편안함을 선사한다. 1989년은 봄은 비가 잦고 여름은 건조했던 빈티지로 비교적 가벼운 스타일의 와인이 생산됐다. 

 



김윤석 기자  wineys@wine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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