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와인 특집 기사의 일환으로 쓴 아티클. 개인적으로는 론 품종 쪽에 좀 더 포커스를 맞추고 싶었지만, 현재 한국 시장 실정에서는 진판델 쪽에 조금 더 관심이 많은 것 같아서 둘을 같이 다루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둘 모두 한국인의 입맛이나 음식에 잘 어울릴 만한 스타일인데, 아직은 다른 지역이나 품종들에 밀려 큰 주목을 받지는 못하고 있는 상황. 한국 시장의 특징이 그렇듯, 뭔가 스타가 하나 나와서 리딩을 해 줄 필요가 있다. 그럴 만한 물량과 브랜드 파워, 적절한 품질을 지닌 와인을 발굴하는 것이 앞으로의 숙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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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리셔스 미국와인 6탄] 진판델(Zinfandel) vs. 론 품종(Rhone varieties)
미국 와인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레드 품종은 아마 카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 일 것이다. 미국 와인을 전 세계에 알린 1976년 '파리의 심판(The Judgement of Paris)' 테이스팅의 주인공이며 현재는 세계 최정상급 품질을 자랑한다. 생산량 또한 가장 많다. 한국에서도 미국 카베르네 소비뇽의 인기는 대단하다. 나파(Napa)나 소노마(Sonoma) 등에서 생산하는 프리미엄 카베르네 소비뇽은 보르도 그랑 크뤼나 이탈리아 슈퍼 투스칸을 능가하는 특급 대우를 받는다. 마트나 일반 와인샵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카베르네 소비뇽 와인들도 빼어난 맛과 품질로 사랑받고 있다. 애호가들은 보통 줄여서 '카소(혹은 까쇼)'라고 부를 만큼 친근한 품종이기도 하다.
하지만 미국에 카베르네 소비뇽만 있는 것은 아니다. 커다란 땅덩어리만큼이나 다양한 품종의 뛰어난 와인들이 존재한다. 얼마 전 딜리셔스 미국와인 4탄 기사로 소개한 피노 누아(Pinot Noir)가 대표적인 예다. 북쪽의 오리건부터 캘리포니아 중남부에 이르기까지 서늘한 기후 지역에서 훌륭한 와인들을 생산하며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양조용 포도 중 카베르네 소비뇽 다음으로 재배 면적이 넓으며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추세다. 그 뒤를 잇는 것은 오늘의 주인공 중 하나인 진판델(Zinfandel)이다. 오래전부터 꾸준히 사랑을 받아온 진판델은 미국의 시그니처 품종으로 꼽힌다. 아르헨티나에 말벡(Malbec), 칠레에 까르메네르(Carmenere)가 있듯 미국에는 진판델이 있는 셈이다. 진판델이 미국의 터줏대감이라면 시라(Syrah)를 중심으로 한 프랑스 론(Rhone) 출신 품종들은 떠오르는 신예들이다. 스스로를 론 레인저스(Rhone Rangers)라고 부르는 혁신적인 생산자들을 중심으로 월드 클래스 와인들을 만들고 있다.
이번 딜리셔스 미국와인 6편에서는 미국의 진판델과 론 품종들에 대해 살펴보고, 대표적인 와인들을 소개한다.
진판델(Zinfandel)
21세기 이전에는 진판델의 기원에 대해 논란이 많았다. 진판델은 이탈리아 남부의 대표 품종인 프리미티보(Primitivo)가 미국에 전해진 것으로, 결국 같은 품종이라는 것이다. 이는 결국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로 정리됐다. DNA 연구를 통해 둘은 같은 품종에서 유래한 것으로 밝혀졌지만, 이탈리아의 프리미티보가 미국으로 전해진 것은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두 품종의 조상은 크로아티아의 토착 품종이며, 진판델은 이탈리아를 거치지 않고 미국으로 바로 전해졌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혹은 떼루아의 영향인지 둘의 성격은 사뭇 다르다. 둘 모두 높은 잠재 알코올 도수와 짙은 색상을 갖추고 있지만 진판델이 조금 더 묵직하고 농밀한 반면, 프리미티보는 바디감은 상대적으로 가볍고 질감도 살짝 까칠하다.
어쨌거나 진판델은 미국을 대표하는 품종이다. 미국만큼 진판델을 잘 만들고 진판델을 내세우는 나라가 없다. 진판델은 19세기 초 미국으로 유입된 후 19세기 중반까지 식용 포도로 인기를 얻었다. 강인한 생명력으로 재배가 쉬웠고, 수확량도 많았기 때문이다. 주로 미국 북동부 지역에서 활발하게 재배했는데, 1850년대 캘리포니아의 골드 러시로 와인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함에 따라 와인 양조용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얼마나 많이 재배했는지 19세기 말에는 캘리포니아 포도밭의 1/3 정도가 진판델이었다고 한다. 이후 부침을 겪었지만, 현재까지도 그 인기를 유지하며 양조용 포도 중 샤르도네(Chardonnay)와 카베르네 소비뇽, 피노 누아, 메를로(Merlot)에 이어 다섯 번째로 많이 재배하고 있다(2017년 기준).
100년 이상 이어져 온 진판델의 인기는 중요한 유산을 남겼다. 20세기 후반부터 진판델의 고급화가 진행됨에 따라 올드 바인 진판델(old vine Zinfandel)이 주목받게 된 것이다. 특히 19세기에 진판델을 활발하게 재배하던 캘리포니아 북동부 로디(Lodi) 지역에서는 100년이 넘어 기괴한 모양으로 꼬인 올드 바인 진판델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조부모, 부모 세대가 재배하던 오래된 고목에서 수확한 복합적이고 응축된 풍미의 진판델로 자손들이 뛰어난 와인을 만든다. 하지만 아쉽게도 고목에서 생산된 빼어난 진판델이 그저 '캘리포니아' 레이블을 달고 출시되는 경우도 제법 많다니 아쉬운 일이다. 올드 바인 진판델이 식재된 포도밭을 테루아를 표현하고 싶은 양조자와 연결하는 것이 로디의 큰 숙제 중 하나다.
이외에 나파 밸리(Napa Valley)와 소노마 카운티(Sonoma County), 파소 로블스(Paso Robles) 등 캘리포니아 전역에서 프리미엄 진판델을 생산한다. 주로 올드 바인에서 수확한 포도나 수확량을 조절하고 엄격하게 선별해 얻은 양질의 포도로 진판델 특유의 농밀한 과일 풍미와 달콤한 스파이스, 초콜릿 뉘앙스를 매력적으로 표현한다. 워싱턴 주 또한 콜롬비아 밸리(Columbia Valley)를 중심으로 합리적인 가격에 품질이 뛰어난 진판델을 만든다. 진판델은 육류 요리와 두루 잘 어울리는데, 특히 숯불구이나 바비큐 같은 직화구이와 환상적인 궁합을 보인다. 캠핑 등 여행지에서 바비큐를 즐길 예정이라면 미국 진판델을 꼭 챙겨보자.
“올드 바인 진판델의 깊고 복합적인 풍미”
코센티노, 시가 로디 올드바인 진판델 Cosentino, Cigar Lodi Old Vine Zinfandel
블랙 커런트, 라즈베리 등 검붉은 베리의 진한 아로마와 초콜릿, 바닐라 등 향긋한 뉘앙스가 어우러져 복합적인 풍미를 드러낸다. 둥근 질감을 타고 드러나는 완숙 과일 풍미와 잔잔히 곁들여지는 삼나무 같은 오크 뉘앙스는 와인의 높은 완성도를 드러낸다. 70년 이상 수령의 올드 바인 진판델로 양조해 프렌치 오크(40% new)에서 9개월 숙성했다. 코센티노는 1980년 미치 코센티노(Mitchi Cosentino)가 설립한 와이너리로, 로디는 물론 나파 밸리, 콜롬비아 등에서 다양한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절묘하게 드러나는 순수한 진판델의 풍미”
그르기치 힐스, 나파 밸리 진판델 Grgich Hills, Napa Valley Zinfandel
블랙베리, 블랙 체리 등 신선한 검은 과일 아로마에 톡 쏘는 후추 같은 향신료가 곁들여진다. 입에 넣으면 잔잔한 타닌과 균형을 이루는 적절한 산미가 견고한 구조감을 형성한다. 3%의 쁘띠 시라가 복합미를 더하는 매력적인 진판델. 그르기치 힐스 소유 중 가장 온화한 포도밭에서 재배한 진판델을 대형 오크통에서 16개월 숙성해 과하지 않은 오크 뉘앙스와 완숙 과일 풍미가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그르기치 힐스 에스테이트는 2008년 미국 생산자 명예의 전당(Vintners Hall of Fame)에 헌액된 마이크 그르기치(Mike Grgich)가 설립한 와이너리로, 나파 밸리를 넘어 미국을 대표하는 와인 생산자로 꼽힌다.
“시간에 따라 다채롭게 변화하는 풍미”
로드니 스트롱, 올드 바인즈 진판델 Rodney Strong, Old Vines Zinfandel
블랙베리, 라즈베리, 자두 등 다채로운 검붉은 과일 향과 함께 크림, 바닐라 뉘앙스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다. 풍미는 입으로 고스란히 이어져 부드러운 타닌과 함께 우아한 여운을 남긴다. 시간에 따라 온화하게 변화하는 맛과 향을 즐길 수 있는 미디엄 풀 바디 진판델. 쁘띠 시라 3%와 토우리가 나시오날(Touriga Nacional) 1%를 블렌딩해 프렌치 오크(40% new)에서 18개월 숙성했다. 로드니 스트롱은 소노마 밸리를 중심으로 캘리포니아 전역에서 빼어난 와인을 생산하는 가족 경영 와이너리다.
“120년 전 조성된 세게지오의 첫 진판델 빈야드”
세게지오, 홈 랜치 진판델 Seghesio, Home Ranch Zinfandel
커런트, 자두의 아로마와 함께 블랙 올리브, 아니스 등의 향신료 뉘앙스가 곁들여진다. 입에 넣으면 풍성하지만 부드러운 타닌과 싱그러운 신맛이 진한 과일 풍미와 어우러져 긴 피니시를 선사한다. 쁘띠 시라 9%를 블렌딩하여 복합적인 풍미를 더했고, 프렌치 & 아메리칸 오크(20% new)에서 14개월 숙성해 적절한 오크 뉘앙스가 매력적으로 드러난다. 세게지오는 120년 동안 5세대를 이어 온 가족 경영 와이너리로, 자타공인 진판델의 명가다. 그들이 120년 전 처음으로 진판델을 심었던 포도밭이 바로 소노마 카운티 알렉산더 밸리(Alexander Valley)에 위치한 홈 랜치 빈야드다.
“영롱한 붉은 베리 풍미에 더해지는 에스프레소 힌트”
발라드 레인, 진판델 Ballard Lane, Zinfandel
체리, 라즈베리, 딸기 등 영롱한 붉은 베리 아로마에 후추, 에스프레소 커피 힌트가 매력적으로 더해진다. 입에 넣으면 완숙 과일 풍미와 조화를 이루는 신맛과 부드러운 타닌이 견고한 구조를 이룬다. 부드러운 질감이 매력적인 풀 바디 진판델. 새벽이 오기 전 수확한 신선한 진판델만 사용해 양조하며 프렌치 & 아메리칸 오크에서 6개월 숙성한다. 발라드 레인은 캘리포니아 센트럴 코스트의 주요 와이너리 중 하나인 밀러 패밀리 와인스(Miller Family Wines)의 핵심적인 브랜드다.
“올드 바인에서 탄생한 유기농 핸드메이드 진판델”
진판델릭, 올드 바인 진판델 Zinfandelic, Old Vine Zinfandel
라즈베리, 체리, 딸기 등 베리류의 풍미에 정향, 시나몬 등의 스파이스 뉘앙스, 섬세한 토양 힌트가 고혹적으로 더해진다. 입에 넣으면 촘촘하지만 부드러운 타닌이 꽉 찬 질감을 선사하며, 풍부한 과일 풍미가 피니시까지 이어진다. 유기농으로 재배한 60년 이상 수령 진판델로 양조해 풍미의 밀도가 뛰어나며, 구입 후 바로 즐겨도 즉각적인 만족감을 준다. 진-판-델릭(Zin-Fan-Delic)이라는 이름 그대로 진판델의 영원한 팬으로 만드는 와인.
진판델 품종을 이야기할 때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스타일, 바로 화이트 진판델(White Zinfandel)이다. 1975년 셔터 홈(Sutter Home) 와이너리에서 우연한 실수로 탄생하게 된 화이트 진판델은 묵직하고 진한 진판델 품종으로 만들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화사한 핑크 컬러에 가볍고 달콤한 맛을 자랑한다. 누구나 음료수처럼 부담 없이 즐길 수 있어 특히 피크닉이나 캠핑용 와인으로 크게 사랑받고 있다. 식사의 마무리에 과일이나 디저트와 함께 즐겨도 좋다. 다가오는 여름의 무더위를 식히기 위한 한 잔으로 시원하게 칠링한 화이트 진판델을 선택해 보는 것은 어떨까.
“미국인이 사랑하는 피크닉 와인”
캐년 로드, 화이트 진판델 Canyon Road, White Zinfandel
체리, 딸기, 크랜베리 같은 붉은 베리와 멜론 등 향긋한 열대 과일 아로마가 매력적으로 어우러져 싱그러운 인상을 남긴다. 입에서는 8%의 낮은 알코올에 가벼운 단맛이 감돌아 누구나 편하게 마실 수 있다. 식사의 마무리로 즐겨도 좋지만, 매콤한 한식과 곁들이면 새로운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캐년 로드는 E&J 갤로의 엔트리급 브랜드로 미국의 베스트 셀링 와인 중 하나다. 1990년대 초반 미국의 여러 특급호텔이 캐년 로드를 하우스 와인으로 사용할 정도로 탄탄한 품질을 자랑한다.
“매콤한 떡볶이와도 어울리는 세미 스위트 와인"
11th 아워 셀러즈, 화이트 진판델 11th Hour Cellars, White Zinfandel
투명하고 예쁜 핑크빛에서 드러나는 잘 익은 복숭아와 상큼한 시트러스 잼 아로마. 적절한 신맛과 은근한 당도가 어우러져 마시기 편하며 피니시까지 깔끔하게 떨어진다. 과일이나 디저트는 물론 떡볶이 같은 분식이나 매콤한 한식과 곁들여도 좋다. '11th hours'는 '마지막 순간'이라는 의미로, 포도 재배와 와인 양조의 최상의 순간을 포착하여 와인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캐주얼하면서 가성비 높은 다양한 와인을 생산한다.
론 품종(Rhone Varieties)
들어가기에 앞서 론 품종이란 무엇인지 먼저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론 품종이란 프랑스 론 밸리(Rhone Valley)에서 많이 재배하는 품종으로 대략 20여 가지 품종을 아우른다. 대표적인 레드 품종은 시라(Syrah), 그르나슈(Grenache), 무르베드르(Mourvedre), 카리냥(Carignan), 생소(Cinsault) 등이, 화이트 품종은 비오니에(Viognier), 루산느(Roussanne), 마르산느(Marsanne), 그르나슈 블랑(Grenache Blanc) 등이 있다.
론 품종들은 1800년대 이민자들에 의해 미국에 들어와 그 역사가 제법 길다. 1919년 금주법의 여파로 거의 사라지는 아픔을 겪었지만, 1970~80년대 보니 둔(Bonny Doon) 와이너리의 랜달 그램(Randall Grahm) 등 몇몇 선각자들이 시라를 비롯한 론 품종들을 재배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중에는 코트 로티(Cote Rotie)와 에르미타주(Hermitage) 와인을 추종하며 시라로 최고의 와인을 만들고 싶었던 조셉 펠프스(Joseph Phelps)도 포함돼 있었다. 덕분에 론 품종들은 부활의 날개를 펼 수 있었고, 이들의 성공에 자극받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재배 또한 늘어나기 시작했다. 현재 시라의 재배 면적은 진판델 바로 다음인 6위다. 1990년대에는 론 레인저스(Rhone Rangers)라는 론 품종에 진심인 와이너리들의 공식 모임도 탄생했다. 캘리포니아뿐만 아니라 워싱턴과 오리건, 미시간 등 다양한 지역의 생산자들이 론 품종의 매력을 알리기 위해 열정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론 품종으로 레드, 화이트, 로제 등 다양한 스타일을 출시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진판델과 대응하는 의미에서 레드 와인에만 포커스를 맞춰 소개한다. 앞서 언급한 품종들 중 시라, 그르나슈, 무르베드르가 중심이 되며 여기에 쁘띠 시라(Petite Sirah) 품종이 더해진다. 뒤리프(Durif)라고도 불리는 쁘띠 시라는 시라의 '작은(petite)' 클론으로 오인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둘은 온전히 다른 품종이다. 잘 보면 스펠링도 다르다. 하지만 프티 시라는 시라와 펠루생 누아(Peloursin Noir)의 교배로 탄생한 품종이기 때문에 완전히 무관한 것은 아니다. 프랑스 품종이지만 현재 론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으며, 오히려 캘리포니아에서 많이 재배해 미국 품종처럼 인식된다. 마치 아메리칸 드림을 찾아 미국에 정착해 성공한 이민자를 보는 느낌이랄까. 쁘띠 시라는 산미가 높고 타닌도 많으며, 톡 쏘는 후추 뉘앙스에 검붉은 베리 풍미가 진하게 드러나 육즙이 많은 고기 요리와 아주 잘 어울린다.
다른 론 품종들도 미국에서 재배 지역의 테루아를 반영한 개성적인 와인들로 다시 태어났다. 특히 최근 인기가 급격히 상승하고 있는 시라의 경우, 캘리포니아는 물론 워싱턴과 오리건 등지의 비교적 서늘한 지역에 자리 잡고 미디엄 풀 바디에 탄탄한 구조와 부드러운 질감, 완숙한 과일 풍미를 겸비한 와인을 만든다. 보통 시라 와인의 스타일을 '단정한 프랑스 론 밸리 스타일 시라'와 '농밀한 남호주 스타일 쉬라즈(Shiraz)'로 나누는데, 미국 시라는 론 밸리의 절제된 스타일에 가까우면서도 호주 쉬라즈의 풍부한 과일맛을 겸비한 와인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지역 별로 차이가 크기 때문에 하나하나 골라 마시는 재미가 있다. 그르나슈와 무르베드르는 단독으로도 빼어난 와인을 만들지만, 블렌딩을 통해 복합적인 풍미를 드러내는 경우가 더욱 많다. 이런 와인들은 풍성한 허브와 스파이스 뉘앙스와 함께 진한 완숙 과일 풍미가 드러나기 때문에 고기 요리와 아주 잘 어울린다. 앞서 진판델을 '바비큐 와인'으로 소개했는데, 시라와 론 블렌드 와인들 또한 그에 뒤지지 않는다. 어떤 쪽이 자신의 취향에 더 잘 맞는지 확인해 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빼어난 품질을 자랑하는 스타일리시 시라”
비엔 나시도, 웰 본 뀌베 시라 Bien Nacido, Well Born Cuvee Syrah
블루베리, 블랙베리 등 검푸른 베리 풍미가 라벤더 등의 플로럴 허브, 톡 쏘는 후추 스파이스 뉘앙스와 함께 밀도 높게 드러나는 스타일리시한 와인이다. 산타 마리아 밸리(Santa Maria Valley)에서 유기농으로 재배한 올드 바인에서 수확한 포도로 양조해 10개월간 프렌치 오크에서 숙성했다. 비엔 나시도를 영어로 직역하면 웰 본(Well Born)이 되는데 이를 와인 이름에 그대로 사용했다. 한국에도 방문한 적이 있는 마스터 소믈리에 윌 코스텔로(Will Costello MS)가 브랜드 앰버서더를 맡고 있다.
“북부 론 스타일의 클래식 시라”
레꼴 No. 41, 콜럼비아 밸리 시라 L'Ecole No. 41, Columbia Valley Syrah
검붉은 베리의 농익은 풍미가 지배적으로 드러나며 은은한 모카, 후추 뉘앙스가 감돈다. 적절한 타닌이 주는 드라이한 미감에 싱그러운 신맛이 더해져 잘 짜인 구조감이 느껴지며, 진한 과일 맛이 부드러운 질감을 타고 피니시까지 전해진다. 콜럼비아 밸리의 최상급 구획에서 손 수확한 시라를 오크통(30% new)에서 18개월 숙성해 필터링 없이 병입했다. 1983년 설립한 레꼴은 워싱턴을 대표하는 명품 와이너리로, 최상의 포도만 선별해 품격 높고 진중한 와인을 만든다.
“워싱턴의 레전드가 만드는 코트 로티 스타일 시라”
파워스, 시라 Powers, Syrah
블루베리, 블랙커런트 등 밀도 높은 검은 베리 아로마에 스파이스와 감초, 가죽, 담뱃잎 뉘앙스가 더해진다. 입에 넣으면 폭탄처럼 터지는 검은 베리 풍미. 풍성한 타닌과 싱그러운 신맛이 만들어내는 단단한 구조와 긴 피니시는 와인의 숙성 잠재력을 가늠케 한다. 시라 96%, 비오니에 4%의 코트 로티(Cote Rotie) 스타일 블렌딩으로 오크통(30% new)에서 26개월 숙성한다. 파워스는 워싱턴을 대표하는 와이너리로, 1988년부터 포도밭 전체에 유기농 재배법을 적용하여 살충제, 제초제 등을 일절 사용하지 않는다.
“4가지 론 품종이 응축미의 절정을 보여주는”
씨네 쿼 넌, 스톡홀름 신드롬 그르나슈 Sine Qua Non, Stockholm Syndrome Grenache
자두, 블랙커런트 등의 농밀한 과일 풍미가 정향 등 고급스러운 허브, 삼나무 뉘앙스와 함께 꿈결처럼 드러난다. 입에 넣으면 우아한 산미, 촘촘한 타닌이 만들어내는 웅장한 구조감과 묵직한 바디, 깊이를 알 수 없는 긴 여운이 몽환적인 느낌을 남긴다. 로버트 파커가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결점이 없는 와인'이라고 평가한 역대 최고의 그르나슈 와인이다. 그르나슈 75%, 시라 22%에 화이트 품종인 루산느 2%, 비오니에 1%를 더해 포인트를 주었다. 시네 쿼 넌은 라틴어로 '필수 불가결하다'는 의미로 말이 필요 없는 미국 최고의 컬트 와이너리다.
“그르나슈에 담은 음악적 감성과 철학”
K 빈트너스, 더 보이 그르나슈 K Vintners, The Boy Grenache
블루베리, 블랙베리, 딸기 등 베리 풍미와 은은한 허브, 감초, 백후추 등 스파이스, 담뱃잎, 가죽 뉘앙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풍미들이 어우러진다. 풀 바디에 긴 피니시를 지니고 있으며 복합미가 뛰어난 와인이다. 맑고 순수한 느낌의 그르나슈로 오크통(15% new)에서 18개월 숙성했다. K 빈트너스는 뮤직 비즈니스에 종사했던 와인메이커 찰스 스미스(Charles Smith)가 2001년 워싱턴에 설립한 와이너리로, 높은 품질에도 불구하고 합리적인 가격을 갖춘 와인을 만든다.
“샤토네프 뒤 파프의 미국적 해석”
파비아, 롬페카베자스 Favia, Rompecabezas
말린 장미꽃 같은 고혹적인 향기와 검은 체리, 자두 등 잘 익은 과일 아로마, 넛멕 등의 스파이스 뉘앙스가 조화를 이룬다. 촘촘하지만 우아한 타닌과 균형을 이루는 신맛, 입안을 꽉 채우는 볼륨감은 다채로운 풍미와 함께 긴 여운을 선사한다. 샤토네프 뒤 파프의 미국식 해석과도 같은 와인으로 무르베드르 51%, 그르나슈 33%, 시라 16%를 사용해 프렌치 오크에서 20개월 숙성했다. 롬페카베자스는 스페인어로 직소퍼즐을 뜻하는데, 조화로우면서도 꽉 짜인 블렌딩을 의미한다. 파비아는 나파 최고의 컬트 와인 스크리밍 이글(Screaming Eagle)의 와인메이커였던 앤디 에릭슨(Andy Erickson)과 애니 파비아(Annie Favia) 부부가 설립한 와이너리다.
“소노마 카운티의 특징을 드러내는 우아한 블렌드”
스카이훅, 레드 와인 Skyhook, Red Wine
다크 체리, 블랙커런트 등 과일 풍미가 가벼운 스파이스 힌트, 에스프레소, 흑설탕 뉘앙스와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유연한 타닌과 균형 잡힌 신맛의 조화는 묵직한 바디감과 둥글고 편안한 질감을 만들어낸다. 진한 과일맛을 순수하게 느낄 수 있는 와인으로 시라 58%에 그르나슈 42%를 블렌딩했다. 스카이훅은 케이머스 빈야드(Caymus Vineyard)의 설립자 찰리 와그너(Charlie Wagner)의 손자 데릭 비틀러(Derek Beitler)가 조부의 경험과 기술을 이어받아 설립한 와이너리다.
“붉은 베리 풍미가 매력적인 미국 스타일 론 블렌드”
한, 지에스엠 Hahn, GSM
체리, 라즈베리, 딸기 등 붉은 베리 아로마를 중심으로 은은한 스파이스 향이 감돈다. 입에 넣으면 역시 붉은 과일 풍미가 주도하는데 정향 등의 허브가 복합미를 더하며, 촘촘한 타닌과 신선한 신맛이 과일 풍미와 하모니를 이룬다. 그르나슈, 시라, 무르베드르의 론 스타일 블렌드를 미국식으로 재해석한 와인이다. 한 패밀리 와인즈는 몬터레이를 본거지로 다양한 가성비 와인을 생산하는 가족 경영 와이너리다.
“캘리포니아 부티크 와이너리가 만드는 이색적인 와인”
부커 빈야드, 자다 Booker Vineyard, Jada
잼처럼 진한 블랙베리, 블랙커런트 풍미를 중심으로 은은한 감초, 허브, 플로럴 아로마가 매력적으로 감돈다. 입에 넣으면 꽉 차는 풀바디에 붉은 베리 풍미가 강렬하게 드러나며, 과일 풍미가 생생한 신맛을 타고 피니시까지 길게 이어진다. 그르나슈 60%에 시라 40%를 블렌딩했으며, 2015년 첫 출시와 함께 매끈한 질감과 진하고 풍부한 맛으로 전문가와 애호가들에게 호평을 받고 있다. 부커 빈야드는 2001년 에릭 젠슨(Eric Jensen)이 파소 로블스(Paso Robles)에 설립한 부티크 와이너리로 생산량이 적어 점점 더 구하기 힘든 와인이 되고 있다.
“론 품종으로 만든 펑키한 스타일의 미국 내추럴 와인”
퓨리티, 스트로베리 데이즈 지에스엠 Purity, Strawberry Daze GSM
상큼한 붉은 베리, 서양배 아로마에 더해지는 가벼운 토양 힌트가 매력적이다. 입 안에서는 선명한 신맛과 거칠지 않은 독특한 질감의 타닌이 느껴지며, 생동감 있고 자연스러운 인상을 남긴다. 그르나슈, 시라, 무르베드르를 블렌딩해 만든 플로럴하고 펑키한 스타일의 내추럴 와인. 퓨리티 와인은 내추럴 와인에 매료된 와인 메이커 노엘 디아즈(Noel Diaz)가 2013년 시에라 풋힐즈(Sierra Foothills)에 설립한 와이너리로 테루아를 드러내는 와인을 지향한다.
“앙증맞은 핑크 돼지 처럼 독특한 로제”
호그와쉬 로제 Hogwash Rose
투명한 핑크 컬러에 향긋한 플로럴 아로마와 체리, 딸기, 라즈베리 등 풍성한 과일 풍미는 눈코입 모두를 만족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다. 일반적인 로제 와인에 비해 바디감이 좋아 훈제 연어나 닭고기는 물론 바비큐와도 잘 어울린다. 과일 타르트나 가벼운 핑거푸드와 즐기기도 안성맞춤. 그르나슈 100%를 사용해 캘리포니아 스타일로 양조한 아름다운 핑크빛 로제 와인으로, 앙증맞은 핑크 돼지 레이블과, 꿀꿀이죽을 뜻하는 'hogwash'라는 특이한 이름부터 눈길을 잡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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