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하다'는 말이 '가격이 저렴하다'와 동일한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있다. 이는 쪼들리는 살림과 어려운 경제 상황이 만들어낸 현상일 수 있다. 질좋은 제품을 저렴한 가격에, 심지어는 이 가격으로 판매해도 괜찮나 싶을 정도로 낮은 가격에 판매하는 양심적(?) 판매자들에 대한 찬사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표현이 폭력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하면 대단히 위험해진다. 제값을 받는 사람들을 장사치로 매도하며, 심지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거나 부가가치를 높이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은 비정상적으로 높은 이윤을 붙여 부당한 이익을 챙기려는 나쁜 사람들이라고 비난한다. 반대로 아래 기사에서 언급한 대로 규모의 경제가 가능한 큰 기업에 대한 뜬근 없는 찬사로 굴절되는 경우도 있다.
좋은 제품 싸게 파는 거, 나도 좋아한다. 그리고 제품을 살 때 가장 민감하게 보는 것이 바로 가격이다. 사람이라면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무조건 싼게 좋다는 생각은 위험하다. 그리고 왜 그 가격이 책정되었는지에 대한 현명한 판단이 필요하다. 시장은, 사회는 만만한 것이 아니다.
원문은 wine21.com에서 확인하실 수 있으며 본 포스팅은 기사 작성자 본인의 블로그 스크랩입니다.
얼마 전 모 지상파에서 와인 가격에 대한 뉴스가 나왔다. '15%의 관세가 철폐됐는데도 수입상들의 횡포로 와인의 소비자 가격은 여전히 비쌌다. 하지만 한 병에 4,900원짜리 와인까지 등장하는 등 점점 거품이 꺼지고 있다'는 보도였다. 이어 ‘수입상들이 관세 철폐분 만큼 추가 마진을 붙여 (가격이 내리지 않아) 소비자들이 와인을 외면했지만, 대형 유통업체들이 활로를 찾기 위해 손을 걷어붙였다’고 덧붙였다. 이쯤 되면 이게 소설인지 뉴스인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국세청 통계에 따르면 한국 와인 시장은 금융 위기로 주춤했던 2009년을 제외하면 1998년 이래 꾸준히 성장세였다. 소비자들이 외면했는데 수입은 늘고 시장은 커졌다니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게다가 이 뉴스는 수입상들은 폭리를 취했고 유통업체는 가격인하를 위해 노력했다는 근거가 뭔지는 알려 주지 않았다. 4,900원짜리 와인을 출시한 것이 그 근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와인 가격이 4,900원이라니, 대단하긴 하다. 맥주 두 캔 정도 가격이니까 용량까지 감안하면 맥주 값이랑 비슷한 셈이다. 어라, 생각해 보니 포도 값보다 더 싼 것은 아닌가? 750ml 와인 한 병을 만들려면 대략 포도 1kg 이상이 필요하다. 칠레산 등 수입 포도 kg당 소매가를 검색해 보니 모 온라인 마트 기준 저렴한 것은 5천원 전후, 일부는 1만원을 훌쩍 넘기도 한다. 이럴 수가. 와인은 포도를 양조하고 유리병에 담아야 하기에 제조비와 병, 마개 등 추가 비용이 들어간다. 그런데도 와인보다 포도 값이 더 비싸다니. 위 뉴스의 논리대로라면 포도 수입상이 횡포를 부리는 것 아닌가. 아, 포도의 품종이나 품질 상태, 맛 등이 다르니까 그런 것 아니냐고? 갑자기 오래된 <개콘>의 유행어가 떠오른다. “그걸 아는 사람이 그래~?”
사실 와인이야말로 다양성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제품이다. 품종, 국가/지역, 포도 수확 방법, 양조자, 생산 방법, 스타일, 빈티지 등 다양한 변수의 조합에 따라 제품의 성격과 품질, 가격이 완전히 달라진다. 생산량 또한 천차 만별이다. 매년 몇 백만 병 이상 대량 생산하는 와인도 있고, 조그만 밭에서 손으로 수확한 포도를 정성스럽게 양조하여 겨우 몇 백 병 생산하는 와인도 존재한다. 단순히 생각해도 두 와인의 가치와 가격이 같을 수 있을까?
이런 기사의 기저에는 '저렴한 것=착한 것'이라는 논리가 깔려 있다. 그래 착한 와인, 어감부터 참 좋다. 먹을만 한 것, 쓸만한 것을 싸게 내 놓으면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문제는 다른 쪽에 덤터기를 씌우려는 데 있다. 아니, 싼 것은 싼 대로 미덕이 있다는 건 알겠는데 그보다 비싼 건 왜 횡포인지 모르겠다. 논리적으로 따져봐도 그렇다. 고등학교 수학 시간에 배운 집합과 명제 단원을 떠올려 보자. ‘저렴하지 않은 것(≒비싼 것)은 착하지 않은 것’이라는 문구는 ‘저렴한 것은 착한 것’이라는 명제의 ‘이’다. 수업시간에 졸지 않았다면 알 것이다. 명제가 참이라고 이가 참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아차, 그러고 보니 ‘저렴한 것은 착한 것’이라는 명제가 참인지도 검증이 안 되긴 했다.
대형 유통업체, 이른바 대형 마트 같은 곳에서 ‘착한 와인’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팔리게 될까. 대형 마트는 다양한 제품을 대량으로 취급하기 때문에 개별 품목의 마진율에 덜 민감하다. 때문에 일부 품목의 가격을 낮춰 고객을 확보하는 전략을 쓰기도 한다. 이른바 미끼상품이다. 미끼상품을 사러 방문한 고객은 다른 제품도 함께 구매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전체 매출이 증가하고 이윤 또한 늘어난다. 대규모 와인 유통업체도 마찬가지다. 몇 가지 와인의 가격을 낮춰 고객의 내방을 유도하면 다른 와인의 판매 또한 증가하니 비슷한 효과를 누릴 수 있다. 게다가 막강한 유통망이나 체인점 등을 소유하고 있다면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기가 훨씬 수월해진다. 그래서 해외 현지 판매상과 직접 계약을 맺고 미끼상품용 와인을 더욱 저렴하게 수입할 수 있는 것이다. 마진 또한 최저 수준까지 낮추거나 심지어 손해를 봐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전체 매출과 이윤이 상승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면 말이다. 대형 유통업체의 입장에서는 이런 와인들이 고객을 끌어모으는 미끼가 되니 ‘착한 와인’이다. 그렇다고 이들의 원가 절감 노력을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런 와인을 찾기 위해 그들은 얼마나 많은 조사를 하고 치열하게 협상하며 프로세스 개선을 위해 노력했을까.
하지만 일반적인 수입사, 특히 소규모 수입사의 입장은 다르다. 규모의 경제를 선택하는 대신 개성있는 와인으로 포트폴리오를 채운 수입사라면 품목당 수입량이 적기 때문에 수입 단가가 높아지고 당연히 마진율을 낮출 여력은 작아진다. 그 와인들을 팔아서 기업을 유지할 만큼 이윤을 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들을 비난할 수 있을까. 다양한 와인들이 한국에 소개되고 와인 문화의 폭이 넓어지는 데 이런 수입사들의 기여가 적지 않다. 혹시 질이 낮은 와인으로 폭리를 취하는 수입사가 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날이 성장하고 있는 한국 와인 시장에서 그런 수입사는 저절로 도태되고 말 것이다. 그것이 자유시장의 원리가 아니던가.
그러니 부디 ‘착한 와인’을 빌미로 와인의 다양성을 부정하고, 개성있는 와인들을 수입하려 동분서주 불철주야 노력하는 수입사들의 힘을 빼는 짓은 하지 말자. 이는 와인 수입사는 물론 와인 시장과 와인 문화까지, 와인을 세 번 죽이는 짓이다.
김윤석 기자 wineys@wine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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