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술 공부/와인21 기고

article 163. 인시그니아 그리고 그 너머로, 죠셉 펠프스

by 개인 척한 고냥이 2017. 5. 2.

서글서글한 인상에 편안한 말투의 빌 펠프스 씨. 하지만 반짝이는 눈매와 호기심 넘치는 표정에서 그의 성격을 엿볼 수 있었다. 이날도 디너 전 휴전선 부근에 다녀왔다고^^;; 이런 호기심과 도전이 인시그니아를 너머 새로운 세계로 조셉 펠프스를 이끄는 듯.  



원문은 wine21.com에서 확인하실 수 있으며 본 포스팅은 작성자 본인의 블로그 스크랩입니다.




인시그니아 그리고 그 너머로, 죠셉 펠프스


 

인시그니아(Insignia)가 40번째 빈티지를 맞았다. 메리티지(Meritage) 와인의 효시라는 수식어를 굳이 붙일 필요도 없다. 그 자체가 역사이자 미국을 대표하는 아이콘 와인 인시그니아. 마흔은 불혹(不惑)이라고 했던가. 나이에 걸맞은 흔들리지 않는 품질을 보여준다. 2013년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Robert M. Parker Jr.)가 출시 빈티지인 1974년부터 2012년까지 39개 빈티지를 시음했는데 그가 매긴 평균 점수는 94점에 육박했다. 90년대 이후 빈티지로 한정하면 평균은 95점 이상으로 높아진다. 1991년, 1997년, 2002년 빈티지는 100점을 받았다. 이후 40번째 빈티지인 2013년 역시 배럴 테이스팅에서 96-100점이라는 높은 점수를 기록했다. 금년 11월 한국에 소개되는 인시그니아 2013년이 또 하나의 100점 와인으로 등극할 지 기대된다.

 

그러나 인시그니아만으로 죠셉 펠프스(Joseph Phelps Vineyards)를 논할 수는 없다. 죠셉 펠프스는 나파 밸리(Napa Valley)에서 인시그니아 외에도 수준급 카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과 시라(Syrah)를 양조한다. 소비뇽 블랑(Sauvignon Blanc)과 비오니에(Viognier) 등 화이트 와인도 생산한다. 쇼이레베(Scheurebe)로 소량의 아이스와인을 만들기도 한다. 또한 1999년부터는 소노마 코스트(Sonoma Coast)에 진출하여 피노 누아(Pinot Noir)와 샤르도네(Chardonnay) 와인을 내놓았다. 나파와 소노마에서 만드는 와인들 모두 평론가와 고객들로부터 호평을 얻고 있다. 한국 시장에서의 인기 또한 상당하다. 한국을 방문한 죠셉 펠프스의 소유주 빌 펠프스(Bill Phelps) 씨를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와인바 ‘하프 패스트 텐’에서 만났다. 함께 와인을 시음하며 죠셉 펠프스의 시작, 그리고 현재에 대해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죠셉 펠프스의 소유주, 빌 펠프스 씨]

 

죠셉 펠프스의 설립자는 고(故) 죠셉 펠프스 씨. 빌 펠프스 씨의 아버지다. 건축가였던 그는 60년대에 수버랭 와이너리(Souverain winery, 현 Rutherford Hill) 건축 입찰을 따냈는데 이때 나파 밸리의 풍광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후 나파 밸리에서 와인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1973년 포도밭을 매입했다. 나파 밸리에 존재하는 와이너리 수가 30여 개에 불과하던 시절이었다. 와인을 만들기 이전부터 와인 애호가였던 그는 특히 보르도 그랑 크뤼(Bordeaux Grand Cru) 와인들을 즐겼다. 보르도 스타일 와인을 만들고 싶다는 열망은 당연했다. 그리고 1974년, 와인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메리티지 와인 인시그니아가 탄생했다. 인시그니아는 휘장(徽章)이라는 뜻. 고상한 품격과 강한 인상을 겸비한 와인의 위상과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면도를 하던 죠셉 펠프스 씨의 뇌리에 불현듯 스친 이름이라니 참으로 뼛속까지 창의적인 분이다.

 

인시그니아를 만드는 포도를 생산하는 구획은 빈티지에 따라 달라진다. 해당 빈티지에서 가장 양질의 포도가 열린 구획들을 선정하여 블렌딩한다. 죠셉 펠프스는 스택스 립(Stag’s Leap), 러더포드(Rutherford), 세인트 헬레나(St. Helena) 등 나파 밸리의 주요 지역에 높은 평가를 받는 포도밭들을 소유하고 있다. 각지에 흩어져 있는 포도밭에서 나오는 다채로운 성격의 포도는 다층적인 풍미의 와인을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그 중에서도 최고의 포도만을 엄선하여 양조하기 때문에 격조 높은 와인이 탄생할 수 밖에 없다.

 

 

모든 것은 포도밭에서 결정된다. 이는 죠셉 펠프스의 신념이다. 그렇기에 자가 소유 포도밭에서 재배한 포도만을 사용한다. 또한 8-90년대 필록세라(Phylloxera)로 인해 황폐화된 포도밭을 갈아 엎고 새로운 묘목을 심으면서 포도밭에 대한 과학적 접근이 가능해졌다. 환경과 토양, 한 마디로 떼루아(Terroir)를 반영한 식재와 관리가 이루어진다. 좋은 와인을 꾸준히 생산하기 위해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을 중요한 가치로 여긴다. 이를 위해 화학비료나 제초제 등의 사용을 최소화하는 비오디나미(biodynamie)나 유기농법도 일부 차용하되 맹신하지는 않는다.

 

이런 신념은 소노마 코스트까지 이어졌다. 도전정신과 호기심, 그리고 잠재력에 대한 확신은 죠셉 펠프스를 캘리포니아 해안 부근으로 이끌었다. 그가 선택한 프리스톤(Freestone) 마을은 나파 밸리에서 60mk 정도 떨어진 비교적 가까운 곳이지만 차가운 해류의 영향을 받아 훨씬 서늘하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해당 지역이 포도를 재배하기에는 너무 춥다고 여겼다. 하지만 죠셉 펠프스는 피노 누아(Pinot Noir)와 샤르도네(Chardonnay)를 재배하기에 최적지라고 판단했다. 1999년 프리스톤에 포도밭을 조성하여 현재 패트스롤 빈야드(Pastrale Vineyard, 22.5ha)에서 피노 누아와 샤르도네를, 쿼터 문 빈야드(Quarter Moon Vineyard, 16ha)에서 피노누아를 재배한다. 이 무렵 현재 소유주인 빌 펠프스 씨가 와이너리에 합류했다. 1998년 44세의 나이로 합류한 그는 20년 경력의 변호사였다. 본업을 떠나 와인업계로 들어오는 데 대한 고민은 없었냐고 물었더니 언젠가 가업을 잇겠다고 생각했기에 큰 부담은 없었다고 밝게 대답했다. 그의 아들 윌 펠프스(Will Phelps) 또한 죠셉 펠프스의 마케팅을 총괄하고 있어 가업은 순조롭게 이어질 전망이다.

 

프리스톤 빈야드의 와이너리와 양조팀은 나파 밸리와 완벽히 구분되어 있다. 두 지역의 특성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프리스톤 빈야드의 피노 누아와 샤르도네 모두 서늘한 기후에 맞게 부르고뉴(Bourgogne) 스타일을 지향한다. 이른 아침에 손으로 수확한 포도를 신속하게 양조하며 신선함을 유지하며 숙성은 새 오크통과 2-3년 사용한 오크통 함께 사용한다. 그 결과 미네랄과 아삭한 산미가 살아있는 섬세하고 우아한 스타일이 되었다. 보르도 블렌딩을 처음 시도한 인시그니아가 나파 밸리에 새로운 전형을 제시했듯, 부르고뉴 스타일을 추구하는 프리스톤 빈야드는 소노마 코스트를 대표하는 와인들로 평가되고 있다. 인시그니아를 넘어 죠셉 펠프스가 개척하는 새로운 와인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빌 펠프스 씨와 함께 시음한 네 가지 와인을 간단히 소개한다.

 

 

 

Joseph Phelps, Freestone Vineyards Pinot Noir 2013 Sonoma Coast

무엇보다 깔끔하게 드러나는 산미와 영롱한 미네랄이 매력적인 샤르도네. 은근한 바닐라 뉘앙스에 상쾌한 허브, 향긋한 흰 꽃 아로마. 자두 과육과 백도, 서양배 등 전반적으로 흰 과육 풍미에 파인애플 등 열대과일 힌트가 과하지 않게 더해진다. 방순한 풍미에 매끈한 질감, 깔끔한 피니시에 이르기까지 흠 잡을 데 없이 우아하고 세련된 와인. 프렌치 오크(새 오크 35%, 2-3년 사용 65%)에서 13개월 숙성한다.

 

 

Joseph Phelps, Freestone Vineyards Pinot Noir 2013 Sonoma Coast

정향과 시나몬 케익 같은 비교적 두툼한 첫 향. 처음엔 잘 열리지 않는 듯 하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붉은 체리와 라즈베리 향이 화사하게 피어난다. 입에 넣으면 다크 체리와 붉은 자두, 라즈베리, 그리고 커런트 힌트. 잘 익은 붉은 과일 맛이 명확히 드러나며 섬세한 산미가 잘 살아있다. 신선한 허브와 은은한 꽃 향기, 가벼운 스파이스, 긴 여운을 남기는 바닐라와 초콜릿 피니시 등이 다층적인 맛과 향을 연출한다. 서늘한 대기 위로 내리쬐는 캘리포니아의 밝은 햇살이 느껴지는 피노 누아. 프렌치 오크(새 오크 33%, 2-3년 사용 오크 67%) 에서 13개월 숙성한다.

 

 

Joseph Phelps, Cabernet Sauvignon 2013 Napa Valley

삼나무, 흑연의 첫 향에 이어 명확하게 드러나는 블랙 커런트와 민트 허브. 매콤한 스파이스나 풋풋한 식물성 풍미는 거의 없다. 토스티 힌트와 완숙된 블랙베리의 발사믹 뉘앙스와 생생한 산미가 균형을 맞춘다. 마이야르(Maillard) 반응으로 촉발된 달콤한 구수함이 연상되기도 한다. 풀 바디에 짜임새가 느껴지는 구조, 명쾌한 풍미와 매끈한 질감이 잘 만든 카베르네 소비뇽의 전형을 보는 듯 하다. 카베르네 소비뇽 87%를 기본으로 메를로(Merlot) 5%, 쁘띠 베르도(Petit Verdot) 3%, 말벡(Malbec) 3%, 카베르네 프랑(Cabernet Franc) 2%를 블렌딩했다. 18개월간 프렌치 & 아메리칸 오크에서 숙성하는데 45%는 새 오크, 나머지는 2-3년 사용한 오크를 쓴다.

 

 

Joseph Phelps, Insignia 2013 Napa Valley

고혹적인 삼나무, 가벼운 토양과 스파이스 힌트, 정향, 시나몬 캔디. 잠깐 사이에도 아로마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듯 하다. 입에 넣으면 블랙 커런트, 그리고 블랙베리와 블루베리의 농익은 풍미가 발사믹 뉘앙스를 넘어 캬라멜 시럽 같이 부드럽고 달콤한 인상을 남긴다. (물론 실제로 단맛이 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탄닌은 촘촘하지만 부드러워 벨벳 같으며 높은 산미와 어우러져 빈틈 없는 구조를 형성한다. 알코올(14.5%)은 충분하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다크 초컬릿, 혹은 진한 모카 케익을 먹은 듯 농밀한 피니시가 길게 이어진다. 지금 마셔도 행복하다. 충분히 숙성해서 마시면 더욱 훌륭할 것이다.  

 

2013 빈티지는 카베르네 소비뇽 88%, 쁘띠 베르도 5%, 말벡 3%, 메를로 3%, 그리고 카베르네 프랑 1%를 블렌딩했다. 100% 프렌치 오크에서 24개월 숙성하여 2016년 1월 병입했다. 일반적인 인시그니아는 구획 별로 개별 수확 및 양조한 후 6개월 후에 블렌딩하여 빈티지에 따라 22-26개월 숙성한다. 10년 이상 숙성한 후 음용하면 복합적인 숙성향을 느낄 수 있다. 25-30년 이상 넉넉히 셀러에 보관 가능하다. 어린 빈티지는 디캔터로 브리딩을 한 후 음용하면 풍미를 이끌어내는 데 도움이 된다. 이날은 음용 전 자몽 한 조각으로 입안을 개운하게 씻은 후 리델 컬리 디캔터(Riedel Curly decanter)에 브리딩한 인시그니아가 제공되었다. 양윤주 소믈리에의 품격 높은 서비스를 경험했다.

 

 

 


김윤석 기자  wineys@wine21.com
수입사_나라셀라(NARA CELLAR) 02-405-430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