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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공부/와인21 기고

190. 레드 와인에게 칠링을 허하라

by 개인 척한 고냥이 2020. 12. 12.

익히 알려진 와인 상식들 중에 잘못된 것, 혹은 오해하고 있는 것들이 제법 있다. 대표적인 것 중에 와인 21에 첫 글로 썼던 보당에 대한 것, 그리고 레드 와인의 적정 음용 온도에 대한 것이 포함될 것이다. 사실 최근엔 개인적으로 생굴과 샤블리 조합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고 있다. 정말 한국 사람 입맛에 생굴과 샤블리가 잘 맞을까? 뭐, 가끔은 나도 한 두 개 정도 그렇게 즐길 때도 있지만, 익힌 굴이 샤블리를 포함해 와인과 더욱 잘 맞는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내년엔 잘못된 상식이나 편견 들을 깨는 글을 많이 써 보고 싶다. 

 

원문은 wine21.com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본 포스팅은 작성자 본인이 저장용으로 스크랩한 것입니다.

 

레드 와인에게 칠링을 허하라

 

몇 년 전이었나, 요즘처럼 무더운 여름날 작은 레스토랑에서 레드 와인을 주문한 적이 있다. 그런데 상온에서 보관하던 와인인지 온도가 너무 높게 느껴졌다. 온도를 좀 낮추고 싶어 아이스 버킷을 요청했더니 직원이 근엄한 표정으로 ‘손님, 레드 와인은 원래 상온에서 마시는 겁니다.’라고 알려주었다. 후텁지근한 날씨에 직원과 언쟁까지 벌이고 싶지는 않아서 ‘날이 더워서 좀 시원하게 마시고 싶다’는 말로 결국 아이스 버킷을 얻어 내긴 했지만, 아이스 버킷에 얼음을 채워 온 직원의 썩소를 머금은 애매한 표정은 결국 그날의 와인 맛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

 

그 직원 말대로 레드 와인은 꼭 상온, 그러니까 현재의 기온과 같은 온도로 마셔야 하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섭씨 40도를 넘나드는 사막 한가운데에선 체온보다 높은 미지근한 온도의 레드 와인을 마셔야 한다. 한겨울 알래스카의 이글루에서 와인을 즐기려면 아이스 버킷에 담가 놓은 화이트 와인보다 더 차가운 레드 와인을 마셔야 정상이 된다. 그렇다면 레드 와인은 ‘상온’에서 마셔야 한다는 상식 자체가 이상한 것 아닐까? 사실 이런 것은 상온의 정의를 착각해서 생기는 오해다. 포털 사이트에서 상온(常溫, ordinary temperature)을 검색해 보면 20±5℃ 정도의 온도를 뜻한다. 상온과 유사한 의미로 쓰이는 실온(室溫, room temperature) 또한 인간이 쾌적하게 지낼 수 있는 온도로, 상온과 유사한 범위의 온도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레드 와인은 상온에서 마시라’는 말은 ‘20℃ 정도에서 마시라’는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지금 현재 당신이 있는 곳의 온도와 동일한 온도에서 마시라는 얘기가 아니다.

 

와인 전문가들마다 조금씩 견해가 다르긴 하지만, 레드 와인의 적정 음용 온도는 대략 15℃에서 20℃ 정도라는 데에는 의견이 모아지는 것 같다. 레드 와인이 너무 차가우면 타닌의 떫은 느낌과 쓴맛이 강하게 느껴지며, 향과 맛 또한 화사하게 피어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온도가 너무 높으면 시큼한 맛이 강해지는 데다 흐물흐물하게 퍼진 느낌이 들어 제맛을 느끼기 어렵다. 이런 점 때문에 타닌과 산미의 정도, 바디 등 스타일에 따라서 적정 음용 온도가 조금씩 다르다. 예를 들어 피노 누아(Pinot Noir)나 바르베라(Barbera) 등 산미는 높고 타닌이 적으며 미디엄 바디 정도의 가볍고 생기 있는 레드 와인은 15-16℃의 비교적 낮은 온도가 적당하다. 카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이나 메를로(Merlot), 말벡(Malbec) 등 미디엄 풀 바디 이상의 타닌이 많고 강건하며 묵직한 레드 와인은 보통 17-19℃ 정도로 마셔야 제맛을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더운 여름날 셀러나 냉장고가 아닌 상온에서 보관한 와인의 온도는 어떨까? 당연히 현재 실내 온도와 유사한 온도일 테지만, 그래도 검증을 위해 실제로 와인랙에서 보관하던 와인을 한 병 열어보았다. 실내 온도는 막 30℃를 넘어선 상황이었고, 와인을 오픈하기 직전에 희망 온도를 25℃로 맞추어 에어컨을 켰다.

 

[상온(실내 온도 30℃)에서 보관하던 와인의 온도는 얼마일까]

 

마트에서 산 요리용 온도계로 잰 와인의 온도는 자그마치 29.1℃. 햇빛이 들지 않는 그늘진 곳에 보관된 와인이었지만 실내 온도와 별 차이가 없었다. 그대로 마신다면 와인의 제맛을 느끼지 못한 채 애꿎은 생산자와 판매자만 욕하게 될지도 모른다. 제대로 즐기려면 권장 음용 온도인 17-19℃ 까지 온도를 낮추는 것이 좋다. 가장 빨리 온도를 낮추는 방법은 얼음과 물을 넣은 아이스 버킷이다. 와인 전문가 마이클 슈스터(Michael Schuster)가 쓴 <와인 테이스팅의 이해>에 따르면, 아이스 버킷은 처음 20분 동안 매 2분마다 약 1℃의 온도를 낮춘다. 대략 20-24분 정도면 원하는 온도에 도달할 수 있다. 하지만 아이스 버킷이 없거나 나처럼 아이스 버킷 준비를 귀찮아하는 사람이라면 손쉽게 냉장고를 이용해도 된다. 냉동실에 와인을 넣으면 4-5분에 1℃ 정도 온도를 떨어뜨릴 수 있다. 50분 남짓이면 원하는 온도를 얻을 수 있다는 계산이 선다. 그러나 깜빡하고 와인을 제때 꺼내는 것을 잊어버린다면 소중한 와인이 꽁꽁 얼어버린다는 단점이 있으니 주의할 것. 냉동실을 이용하려면 반드시 타이머를 맞추는 것을 추천한다. 마지막으로 냉장실을 이용하면 속도는 좀 느리지만 안전하게 온도를 낮출 수 있다. 그렇다면 냉장실에서 원하는 온도를 얻으려면 얼마나 걸릴까? 개인적으로는 조금 더 시원하게 즐기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에 16℃ 정도까지 온도를 낮춰 보기로 했다. 위에서 오픈한 와인을 3℃로 설정된 냉장실에 넣어 5분마다 변화하는 온도를 확인해 봤더니 아래와 같았다.

 

[설정 온도 3℃의 냉장실에서 레드 와인의 온도 변화]

 

정밀하지 않은 가정용 온도계이고 온도 확인을 위해 5분마다 냉장고 문을 여닫았음을 감안해야 한다. 어쨌거나 대략 1시간 45분 만에 원하는 온도를 얻을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는 이번처럼 냉장고 문을 빈번하게 여닫지는 않을 테니 좀 더 빠른 칠링이 가능할 것이다. 대략 15분에 2℃ 정도 온도를 낮출 수 있다고 보면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저녁 식사에 곁들일 와인이라면 4시 반쯤 냉장고에 넣어 놓으면 된다. 반대로 냉장고에 보관하던 차가운 레드 와인의 온도를 적정 음용 온도로 올리려면 얼마나 걸릴까? 같은 와인을 잘 막아 냉장고에 넣었다가 5시간 후에 꺼냈을 때 와인의 온도는 6.4℃였다. 이후 25℃의 실내에서 5분 단위로 와인의 온도를 쟀는데 35분 만에 원하는 온도(16.4℃)를 얻을 수 있었다. 한 마디로 냉장 보관하던 레드 와인은 마시기 30분 전에 꺼내면 적당한 온도가 된다는 얘기다.

 

[25℃의 실내에서 차가운 레드 와인의 온도 변화]

 

집안에 보관하던 레드 와인, 온도만 잘 맞춰도 맛이 달라진다. 한여름에 실온에 방치돼 있던 레드 와인이라면 더욱 그렇다. 냉장고를 이용하면 쉽게 온도를 맞출 수 있으니 적극적인 활용을 권한다. 부디, 레드 와인에게도 칠링을 허하라.

 

 

 

레드 와인에게 칠링을 허하라

냉장실을 이용하면 대략 15분에 2℃ 정도 온도를 낮출 수 있다. 저녁 식사에 곁들일 와인이라면 4시 반 쯤 냉장고에 넣어 놓으면 된다. 냉동실에 와인을 넣으면 4-5분에 1℃의 온도를 낮춘다.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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