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스팅을 단지 '맛을 본다'는 관점이 아닌 통합적 감각의 관점과 해석의 문제로 접근한 책. 이 책은 여러 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요약본이 아닌 책 자체를 정독하시길 강력히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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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다.' 맨부커상을 수상한 줄리언 반스(Julian Barnes)의 장편소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서 주인공의 자살한 친구가 한 말이자 소설 전반을 관통하는 주제다. 영화로도 제작되었는데, 한국에서도 잔잔하게 인기를 끌었다. 출간된 지 몇 년 뒤에야 이 책을 접한 나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어지는 동시에 현웃이 터지는 아이러니를 느끼며 단숨에 독파했다. 40년이라는 간극에서 발생하는 사실과 기억의 괴리, 그리고 은근히 충격적인 결말. 사람은 얼마나 자기중심적이며 환경과 조건, 시간의 왜곡에 취약한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한 번, 아니 두 번 이상 읽어볼 만한 울림과 다층적 깊이가 있는 소설이다. 하지만 와인 전문 매체에서 소개할 만한 책은 아니다. 그런데도 굳이 이 책의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소개하려는 책과 주제의식이 은근히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소개하려는 책 제목은 <와인 테이스팅의 과학>. 제목대로 와인 테이스팅에 대한 이야기다. 응? 와인 테이스팅 서적인데 역사와 기억의 왜곡에 대한 소설과 주제의식이 비슷하다고? 이게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책의 원제인 '나는 빨간 맛을 본다(I taste red)'에 힌트가 있다. 와인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붉은 색소를 섞은 화이트 와인을 전문가에게 제공했더니 레드 와인을 표현하는 어휘들을 마구 쏟아냈다거나, 그랑 크뤼 병에 담긴 5달러짜리 와인을 대단히 품격 높은 와인으로 묘사했다는 류의 기사들 말이다. 그렇다면 와인 전문가라는 사람들은 다 사기꾼이라는 말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우린 (어렴풋이) 알고 있다. 심지어 저자인 제이미 구드(Jamie Goode)도 '부르고뉴의 크뤼 별 와인의 차이를 구분해 내는 전문가가 한 명이라도 존재하는 한 떼루아의 차이는 실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대부분의 사람이 차이를 구분하지 못한다고 해서 차이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오히려 이 책은 왜 전문가라는 사람들조차 그런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는지 친절히 설명해 준다.
뭔가를 경험할 때, 우리는 그것을 전체로서 받아들인다. 예컨대 와인을 마실 때 색, 향, 맛, 질감 등을 개별적으로 느끼는 게 아니라 눈, 코, 혀 등 여러 감각기관을 통해 입수한 정보를 통합해 하나의 실체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런 것을 '다중양식감각'이라고 하는데, 통합 과정에서 눈으로 본 것이 코와 혀에서 느끼는 감각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달콤한 과일향이 나는 와인이 더욱 달게 느껴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게다가 역설적이게도 전문가일수록 이런 것에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학습과 경험을 통해 이미 특정 스타일에 대한 프레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위에 제시된 사례의 경우 붉은 색소를 섞은 화이트 와인을 레드 와인으로, 저렴한 와인을 그랑 크뤼로 '의심 없이' 인식하는 순간 그 프레임 안에 갇혀 버리게 된 것이다.
시장에 새로 진입한 생산자가 크고 묵직한 와인병을 사용한다거나, 최근 유행하는 내추럴 와인들이 레이블을 자유롭고 개성적이며 자연 친화적인 분위기로 만드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와인병과 레이블에서 주는 분위기가 고객이 느끼는 와인의 풍미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묵직한 병은 왠지 더 고급스러워 보이고, 자연 친화적인 레이블은 내추럴 와인의 특징을 더욱 부각해준다. 개인적으로도 유사한 경험이 있다. 와인 모임에서 매그넘 보틀을 열면 항상 분위기가 과열되는 현상이 그것이다. 매그넘 보틀을 열 때나 일반 병에 담긴 와인만 마실 때나 마신 와인의 양이나 품질은 유사함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매그넘 보틀을 연 날은 파티 분위기가 더욱 살아났다. 결국 와인을 더 마시게 되는 것으로 귀결되곤 했는데, 그건 단지 우연이었을까? 커다란 매그넘 병의 강렬한 인상이 모임을 축제 분위기로 이끈 것은 아닐까?
사실 와인 전문가의 작업은 와인을 통합적인 감각으로 받아들이려는 일반적인 경향을 넘어서려는 노력이다. 일반인도 와인 향을 맡으면 그것이 와인이라는 것을 안다. 심지어 눈을 감고 향을 맡아도 마찬가지다. 다만 그것을 세부적으로 묘사하기 어려울 뿐이다. 하지만 전문가의 테이스팅 노트는 와인의 색, 향과 풍미, 신맛, 단맛, 알코올의 함량과 구조, 바디감, 여운 등을 모두 개별적으로 구분해 묘사한다. 이런 작업을 위해서는 우선 뛰어난 후각과 미각이 필요하다. 또한 다양한 향과 맛의 '이름'을 알아야 하고, 와인 사이의 상대적 차이에 대해서도 지식과 경험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뭔지는 알아내도 설명이 되질 않는다. 절대 미각을 가졌던 어린 대장금조차도 이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고 생각한 것이온데 어찌 홍시라 생각했느냐 하시면..."
문제는 전문가 테이스팅 노트의 묘사에 정답, 혹은 모범답안이 있냐는 것이다. 유럽의 와인 평론가가 카베르네 소비뇽 품종을 묘사할 때 자주 사용하는 블랙커런트 향은 평범한 한국인이라면 평생 한 번 맡아보기 힘든 향이다. 물론 요즘에는 백화점 식품코너 같은 곳에 블랙커런트 잼 같은 것이 종종 보이기도 하지만, 한국인에게 익숙하지 않은 향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구즈베리, 육두구, 바이올렛 아로마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개인별 차이도 있다. 다섯 명 중의 한 명은 후추향을 맡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면 놀랄 것이다. 너무나 강렬해서 누구나 알 수밖에 없을 것 같은 후추향을 못 느끼는 사람이 20%나 된다니. 그런 사람이 후추향이 매력적으로 감도는 시라/시라즈를 평가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렇게 극단적인 차이는 아닐지라도 후각 및 미각 능력,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는 능력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다.
풍미 지각에 대한 개인별 차이는 크게 세 가지 요소 때문에 발생한다. 첫째는 미뢰의 분포와 밀도, 후각 수용체의 구성 등 신체 기관 자체의 유전적이고 물리적인 차이다. 때문에 같은 냄새를 맡아도 사람마다 다르게 느낄 수 있다. 침의 양과 분비 속도도 와인의 질감과 바디감의 차이를 만든다. 둘째는 경험에 의한 차이다. 사람은 처한 환경 및 문화적 상황 등에 따라 감각적 경험이 달라진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사람은 맛과 향을 개체 단위로 인식하기 때문에 경험에 따라 감각이 연합되는 형태와 받아들이는 느낌에 차이가 발생한다. 흰쌀밥을 물에 말아서 김치를 얹어 먹던 사람과 토마토소스 파스타를 먹고 자란 사람의 맛의 기준은 다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셋째는 와인을 맛볼 때 개입하는 지식이나 기대, 기호의 영향이다. 특정 풍미에 대한 호불호는 지각 자체는 물론 평가에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전통적으로도 후각과 미각은 주관적인 것으로 여겨져 왔다. 칸트는 미각과 후각은 주관적인 것이며 그를 통해 얻는 것은 외부 대상을 인지하는 것이라기보다 즐거움의 표상에 가깝다고 했다. 맛과 향이 전적으로 주관적인 것이라면 와인 전문가와 개개인의 판단은 다를 수 있는데 왜 우리는 전문가의 의견에 신경을 쓰는 걸까. 로버트 파커 100점 와인에 열광하고, <와인 스펙테이터>에서 발표하는 연발 100대 와인에 촉각을 세우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와인 시음과 평가가 와인 애호가 세계에서 심미적인 이해와 감상의 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테이스팅 노트를 통해 애호가들이 납득할 만한 설명과 평가를 제시하는데, 와인의 종류와 스타일에 대한 지식, 그리고 와인의 맛과 향을 감별하고 분석할 뿐만 아니라, 와인의 감각 특성들을 조합하여 포괄적인 특징을 파악하고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예컨대 '균형이 좋은', '우아한', '조화로운', '다층적인', '복합적인'과 같은 표현은 와인을 구성하는 요소는 아니지만 와인의 맛과 향, 질감 등을 통해 적절한 표현을 찾아낸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심미적 판단력'이 지식이나 감별 능력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심미적 판단력은 혼자서 익힐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큰 틀에서 상호 이해 가능한 역량이 갖춰진 공동체 내에서만 습득할 수 있는 것이다. 그 공동체 내에서 서로 감각적인 인상을 공유하며 만들어진 심미적 체계가 판단의 기준이 된다. 이 심미적 체계는 분명 하나의 기준으로 작용하지만, 개인적인 판단을 기반으로 형성한 것이므로 상호주관성을 갖는다. 많은 주관들 사이에서 공통으로 인정하는 무언가라는 이야기다. 원칙적으로 각자의 경험과 의견이 공동체 내애서 받아들여지고 영향을 미치면서도 개개인의 독자성 자체를 침해하지는 않는 관계다. 이런 논리에서 평론가의 평가와 점수를 참고하면서도 자신의 입맛을 찾아가는 애호가도 충분히 존재할 수 있다. 전문가의 평가가 애호가의 입맛 자체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애호가를 새로운 맛과 가치의 세계로 인도하는 것이다.
이런 상호주관성을 가진 심미적 판단의 공동체와 그들이 형성한 담론들은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존재해 왔다. 예컨대 부르고뉴 등 대표적 와인 산지를 중심으로 하는 떼루아 중심의 클래식한 담론이 있고, 로버트 파커와 그의 100점 만점 시스템을 기반으로 한 담론도 있다. 최근에는 지속 가능한 농법과 바이오다이내믹, 내추럴 와인 같은 친환경 담론이 급격하게 떠오르고 있다. 그중 하나만 정답인 것은 물론 아니다. 그중 어떤 담론을 택할지, 혹은 여러 담론을 동시에 참고할지는 각자의 몫이다. 다만 나 홀로 독야청청 개인의 길을 찾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가능하지도 않다. 와인 안의 알코올만을 탐하려는 것이 아닌 이상, 와인을 마시는 것은 결국 심미적인 경험임과 동시에 와인을 둘러싼 담론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와인을 마시면 꼭 뭐라도 한 마디 보태고 싶어 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한마디들이 비비노(vivino.com) 같은 곳에 모여 또 다른 담론을 형성하고 있다.
이 책의 주제는 결국 시음과 의사소통이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냐는 것이다. 저자는 아마도 자유로운 소통과 즐거움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담론의 필요성을 말하고 싶었던 듯하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감각에 대한 이해와 상호주관성의 존중이 있다. 풍미 지각에 개인차가 존재한다는 점을 이해하고 그 차이를 부각하지 않도록 노력할 때 각자의 다채로운 감각이 심미적 경험으로 화사하게 피어날 수 있을 테니까. 맞다. 우리가 와인에서 원하는 것은 영화 <매트릭스>처럼 꽉 짜여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정형화된 현실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선택은 항상 파란약이 아니라 빨간약이다. 우리는 빨간색을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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