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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음주/와인

Chateau Cheval Blanc 1989 / 샤토 슈발 블랑 1989

by 개인 척한 고냥이 2021. 12. 6.

샤토 슈발 블랑 1989(Chateau Cheval Blanc 1989). 샤토 오존(Chateau Ausone)과 함께 보르도(Bordeaux) 우안을 대표하는 와인으로, 생테밀리옹 프르미에 그랑 크뤼 클라쎄 A(Saint-Emilion Premier Grand Cru Classe A) 등급에 빛나는 와인이다. 2012년 샤토 앙젤뤼스(Chateau Angélus)와 샤토 파비(Chateau Pavie)가 그랑 크뤼 클라쎄 A로 승급된 것에 불만을 품고 다음 생테밀리옹 등급 심사에는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는 소문이 들고 있다.

어쨌거나 친한 분들끼리 조촐하게 모이는 송년회에 갔다가 급작스럽게 만나서 쫌 많이 당황했다.

 

갑자기 길에서 수지 만난 기분.... 아니, 이 경우엔 수지맞은 건가;;;

 

내가 이 와인에 대해 밭이 어떻고 양조가 어떻고 왈가왈부 하는 건 별 의미가 없을 것 같다. 한 사이트에서 정리한 전문가 평점으로 대체. 현재 가격은 해외가 기준 최저 500~600달러 수준에서 형성되고 있는 것 같다.

 

공식 홈페이지에 따르면 1989년 빈티지는 상당히 덥고 건고한 해였다. 하지만 최고 온도가 엄청 높았던 것은 아니고 평균 온도가 높았다고 한다. 기록된 최고 온도는 32.5°C에 불과했다고. 하지만 평균 온도가 올라간 데다 일조량은 평균 13% 이상 증가했고, 여름 내 비가 오지 않아 매우 건조했다.

덕분에 곰팡이 등 질병의 위험이 거의 없어 포도의 상태는 매우 좋았으며, 풍미가 잘 응축됐다. 그러면서도 평균 대비 수확량이 거의 50% 가까이 늘었다. 수확 당시 메인 품종인 메를로(Merlot)와 카베르네 프랑(Cabernet Franc)의 상태는 차이가 컸다고 한다. 메를로는 대단히 잘 익어서 jammy/candied 뉘앙스까지 드러낸 반면, 카베르네 프랑은 더위로 인한 스트레스로 인해 어마어마한 플로럴 아로마와 허브 향기를 드러냈다고. 이렇게 극단적으로 다른 성격을 지니게 된 두 품종의 블렌딩을 통해 아주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다고. 다층적인 풍미와 함께 장기 숙성 잠재력까지 기대할 수 있는 빈티지라는 설명이다.

 

코르크 오픈. 가져 오신 분은 상태가 정상일지 매우 걱정하셨지만,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넘나 로맨틱, 성공적.

 

올드 빈티지인 만큼 섬세하게 아소로 집도.

 

아따, 코르크 길다... 30년 넘은 코르크 치고는 상태도 매우 좋은 편.

 

Château Cheval Blanc 1989 Saint-Émilion 1er Grand Cru Classé A
샤토 슈발 블랑 1989 생테밀리옹 프르미에 그랑 크뤼 클라쎄 A

넘나 잘 익어서 컬러가 진짜 딱 가넷이다. 농염한 가넷 컬러에 넓게 드러나는 오렌지 휴. 처음 코를 대면 부엽토나 모아 둔 낙엽 같은 가을의 느낌이 진하다. 뭔가 한풀 꺾여서 사멸의 문턱으로 가고 있는 듯한 느낌. 입에 한 모금 넣어 보아도 타닌은 다 녹아버린 듯 균형을 이루는 산미와 함께 부드럽고 온화한 느낌만이 살짝 드러난다. 그런데, 살살 돌리다 보니 뭔가 시나몬, 정향 등 따뜻한 스파이스의 기운이 감돌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생동감 있는 그린 허브의 향이 피어나기 시작한다. 거기에 은근한 오크, 매콤한 스파이스, 심지어 사라진 줄 알았던 블랙커런트, 완숙한 블랙베리 등 과일 코어까지 재생되는 느낌. 약간 씁스름한 뉘앙스와 함께 타닌감까지도 되살아나는 느낌이다. 마실 때는 몰랐던 내용이지만, 빈티지의 설명과도 상당히 일치하는 느낌이다.

놀랍다. 30년 넘게 숙성되며 숨죽이고 있던 와인이 공기를 만나 부활하는 모습이. 도대체 이런 와인의 생명력은 언제까지 유지되는 걸까. 잔에 따라 두고 3시간을 넘게 즐겼는데, 마지막 한 모금까지도 아름답게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이런 급의 와인, 특히 잘 숙성된 양호한 상태의 와인을 경험할 기회는 흔치 않지만 만날 때마다 그 경이로운 모습에 깜짝 놀라곤 한다. 아마도 이런 게 전설적인 와인을 모으는 이유겠지. 어렵게 구입해 랩까지 씌워서 고이고이 셀러링하던 와인을 이렇게 모두를 위해 오픈해 주신 ㅅㅅ님께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다.

 

개인 척한 고냥이의  [ 알코올 저장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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