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을 즐기기 시작한 2000년대 중후반부터 좋아했었던 마르쿠스 몰리터. 마르쿠스 몰리터의 와인은 섬세한 신맛과 영롱한 미네랄이 레이스처럼 고혹적으로 드러나는 우아한 와인이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와인. 보이면 사야 한다. 잘 안 보이는 게 문제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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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같은 리슬링에 담아낸 모젤의 테루아, 마르쿠스 몰리터(Markus Molitor)
독일 모젤(Mosel) 지역의 저명한 와인메이커 마르쿠스 몰리터. 그에게는 미스터 300점(Mr. 300 Point)이라는 영광스러운 별명이 있다. 한글로 번역하면 영 어색하지만 의미를 알고 나면 깜짝 놀라게 된다. 2013년 빈티지의 세 와인이 동시에 <로버트 파커(Robert Parker)>로부터 100점을 받으면서 생긴 별명이기 때문이다. 한 번도 받기 어려운 100점을 한꺼번에 세 와인이나 받다니. 하지만 놀라기는 이르다. <로버트 파커>로부터 100점을 받은 그의 와인은 지금까지 19개나 되니까. 이렇게 엄청난 이력을 자랑하는 마르쿠스 몰리터의 와인이 국순당을 통해 한국에 본격 수입됐다. 이를 기념해 바인굿 마르쿠스 몰리터(Weingut Markus Molitor)의 수출담당 이사 다니엘 키오프스키(Daniel Kiowski) 씨가 한국을 방문해 한국 고객들을 직접 만나는 자리를 가졌다.
몰리터 가문은 모젤에서 8대를 이어 포도를 재배해 온 유서 깊은 집안이다. 그런데 마르쿠스 몰리터가 와이너리를 설립하고 처음 와인을 만들기 시작한 1984년에 보유하고 있던 포도밭은 1.5헥타르에 지나지 않았다. 마르쿠스 몰리터의 부모님 대에 집안이 어려워지는 바람에 포도밭을 모두 팔았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마르쿠스 몰리터의 아버지가 사고로 오른팔을 잃는 바람에, 마르쿠스 몰리터는 어린 시절부터 말 그대로 아버지의 오른팔 역할을 해야만 했다. 그렇게 어려운 시절을 견디고 힘들게 모은 돈으로 포도밭을 다시 구입하고 지금의 와이너리를 세운 것이다.
이후 마르쿠스 몰리터가 이룬 성공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는 1990년대 보르도 와인 엑스포에서의 충격적인 기억을 잊지 못한다고 한다. 당시는 모젤 와인의 국제적인 인기가 바닥을 치던 시절이었고, 3일 동안 그의 부스에 방문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후 그는 최고의 와인을 만들기 위해 잠잘 시간도 아껴 가며 일했고, 그런 노력은 마르쿠스 몰리터를 현재의 위치에 올려놓은 기반이 되었다.
1984년 구입한 와이너리는 벨레너 클로스터베르크(Wehlener Klosterberg)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19세기에 세워진 고전적인 저택인데 2009년부터 3년간 대대적인 리노베이션을 거쳐 최첨단 설비를 갖췄다. 1.5헥타르로 시작한 포도밭은 현재 120헥타르에 이른다. 그중에는 베른카스텔(Berkastel), 벨렌(Wehlen), 젤팅엔(Zeltingen) 등 명성 높은 마을에 위치한 그랑 크뤼급 포도밭이 즐비하다.
그가 보유한 위대한 포도밭들은 급격한 경사지에 위치하고 있다. 때문에 관리하기가 매우 어렵다. 30도 이상의 경사는 기본이고, 70도를 넘는 곳도 허다하다. 위르지거 뷔르츠가르텐(Ürziger Würzgarten) 같은 포도밭은 경사도가 85도에 이른다. 거의 절벽 수준이다. 모든 작업이 수작업으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같은 면적을 관리하는 데 드는 시간과 노력이 평지 포도밭의 5배에서 10배에 이른다. 마르쿠스 몰리터에서 일하는 90명의 정규 직원 중 65명이 포도밭 전담 직원이며, 계절 별로 수많은 임시직원이 포도밭 관리에 투입되는 이유다. 포도밭의 토양은 대부분 편암으로 구성돼 있다. 하지만 포도밭마다 그 성질이 다르다. 예를 들어 위에서 언급한 위르지거 뷔르츠가르텐의 경우 철분이 많은 붉은 편암이다. 이렇게 개성적인 토양과 급경사가 결합해 익숙해지면 쉽게 골라낼 수 있을 정도로 차별적인 풍미의 와인을 만들어낸다.
마르쿠스 몰리터의 핵심 품종은 리슬링(Riesling)이다. 전체 포도밭의 90%를 차지하며, 나머지 포도밭에서 피노 누아(Pinot Noir), 피노 블랑(Pinot Blanc) 등을 재배한다. 리슬링은 수정처럼 맑고 투명한 품종이다. 그래서 포도밭과 기후의 특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진정한 테루아(Terroir) 와인을 만들어낸다. 척박하고 배수가 잘 되며 일교차가 큰 포도밭에 식재된 리슬링은 늦가을의 햇살을 충분히 받으며 복합적인 풍미를 발전시킨다. 때문에 다른 지역처럼 충분한 일조량이나 적은 강수량 등을 특별히 강조하지 않는다. 실제로 다니엘 씨는 “모젤은 알자스보다 평균 기온이 2도 정도 낮으며, 일조량도 적고 비도 더 많이 온다”라고 덤덤하게 얘기했다. 대신에 개화부터 포도 수확까지 걸리는 기간이 보통 150일 정도로 상당히 길다. 부르고뉴(Bourgogne)가 보통 100일 정도임을 감안하면 거의 1.5배 수준이다. 어려운 환경에서 긴 시간을 견뎌 내며 최상의 품질을 완성하는 것이다.
단지 품질만 좋은 것이 아니다. 리슬링은 대단히 다양한 스타일을 만들 수 있는 잠재력을 지녔다. 때문에 모젤의 리슬링은 드라이부터 스위트까지 다양한 당도의 와인을 만들 수 있다. 양조 용기 또한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부터 오크 배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사용한다.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부르고뉴 꼬뜨 드 본(Côte de Beaune)의 화이트 와인이 오크통에서 숙성한 드라이 와인 스타일로 고정돼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모젤 와인은 만들려는 스타일에 따라 완숙 정도가 다른 포도를 사용한다. 위 사진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카비넷(Kabinett)은 수확기가 시작된 후 일주일 이내에 수확한 어리고 새콤하며 싱싱한 녹색 포도알을 사용한다. 슈페트레제(Spätlese), 아우스레제(Auslese)로 갈수록 포도알이 더욱 완숙해 쪼그라들며, 아우스레제 말미부터 귀부균의 영향을 받은 포도알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카비넷 수확시기로부터 3~4주 정도 지나면 베렌아우스레제(Beerenauslese)급 포도가 되는데, 트로켄베렌아우스레제(Trockenbeerenauslese)용 포도알은 이 시기에 수확한 포도알을 하나하나 골라가며 찾아내야 한다. 트로켄베렌아우스레제용 포도알은 거의 건포도에 가까워 '마른 포도알을 골라서 수확한다'는 의미에 완전히 부합하는 포도알만을 사용하는 셈이다. 이런 포도알을 사용해 와인을 만드니, 생산량은 극히 적고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을 수밖에 없다.
주의할 점이 있다. 당도 등급은 포도즙의 당도에 따라 구분한 것이지, 완성된 와인의 당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보통 프라디카츠바인은 모두 스위트 와인이고 특히 아우스레제 이상은 모두 디저트 와인 수준의 당도를 지닌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아우스레제 중에도 드라이한 와인이 있다. 그리고 이런 달지 않은 아우스레제를 잘 만드는 것으로 유명한 생산자가 바로 마르쿠스 몰리터다.
참고로 마르쿠스 몰리터에서는 고객들의 혼동을 방지하기 위해 2007년부터 와인의 당도에 따라 캡슐의 컬러를 구분해 사용하고 있다. 화이트는 드라이, 그린은 오프-드라이, 골드는 스위트 와인이다. 화이트 캡슐과 그린 캡슐은 카비넷부터 아우스레제까지 만들며, 골드 캡슐은 카비넷부터 트로켄베렌아우스레제까지 모든 등급을 만든다. 화이트 캡슐은 등급이 올라갈수록 알코올 도수가 높고 더욱 완숙한 과일 풍미가 드러난다. 깔끔한 여운을 위해 귀부균의 영향을 받은 포도는 사용하지 않는다. 그린 캡슐은 적당한 단맛과 신맛이 조화를 이루는 와인으로 음식과 함께 즐기기에 가장 알맞다. 특히 스파이시하고 짭짤한 아시안 푸드나 바비큐 같이 훈연향이 나거나 직화로 요리한 고기 요리와 아주 잘 어울린다. 다니엘 씨는 김치, 멜젓에 찍은 삼겹살 등과도 아주 잘 어울릴 거라며 함께 마셔볼 것을 강력 추천했다. 골드 캡슐은 바로 마셔도 좋지만 10년 이상 숙성한 후 즐기면 고혹적인 풍미가 복합적으로 드러난다. 특히 아우스레제 이상의 골드 캡슐은 30년 이상 숙성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녔다. 일반적으로 단맛이 거의 없는 화이트 캡슐은 3천 리터 크기의 중성적인 오크통을 사용해 양조한다. 반면 단맛이 있는 그린 캡슐과 골드 캡슐은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양조한다.
고급 와인 하면 보르도나 부르고뉴 와인을 먼저 떠올리지만, 과거엔 독일 모젤 지역 와인이 더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일례로 1899년 유명 호텔 레스토랑의 와인 리스트를 보면 샤토 오브리옹(Chateau Haut Brion)을 비롯한 보르도 5대 샤토의 가격보다 모젤 와인의 가격이 2배가량 높았다. 이렇게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던 모젤 와인들은 1, 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수요가 급격히 줄었으며, 생산기반 또한 많이 파괴되어 생산 또한 격감했다. 게다가 모젤 와인은 포도밭 별로 복잡하게 나뉘어 있는 데다 독일어로 된 레이블을 읽기도 어려워 그 인기를 회복하기가 더욱 어려웠다.
하지만 현재는 뛰어난 생산자와 그랑 크뤼급 포도밭을 중심으로 모젤의 명성을 회복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위대한 포도밭과 뜨거운 열정을 지닌 마르쿠스 몰리터가 있다. '80%의 경사, 90%의 리슬링, 그리고 100%의 열정'을 지닌 마르쿠스 몰리터. 빼어난 안목을 지닌 한국 애호가들로부터도 큰 사랑을 받을 것으로 기대한다.
화이트 캡슐(드라이)
마르쿠스 몰리터, 벨레너 클로스터베르크 리슬링 카비넷 2020 Marcus Molitor, Wehlener Klosterberg Riesling Kabinett 2020
은은한 부싯돌 힌트의 청량한 첫인상. 백도, 흰 자두 등 흰 과육 풍미가 은은하게 드러나며, 라임 같은 새콤한 신맛이 길게 이어진다. 피니시에서 살짝 드러나는 알싸한 느낌이 신맛과 어우러져 깔끔한 여운을 선사한다. 식전주나 핑거 푸드, 샐러드 등과 곁들여 마시기 좋다.
마르쿠스 몰리터, 위르지거 뷔르츠가르텐 리슬링 슈페트레제 2019 Marcus Molitor, Urziger Wurzgarten Riesling Spetlese 2019
위르지거 뷔르츠가르텐 특유의 오묘한 스파이스, 철분 같은 미네랄 뉘앙스와 함께 완숙한 핵과 풍미가 섬세하고 날카롭게 드러난다. 입안에 머금으면 짭조름한 뉘앙스가 살짝 드러나 상쾌한 신맛과 함께 입맛을 돋운다. 모젤 리슬링 중에서도 특히나 도드라지는 개성이 인상적인 와인.
마르쿠스 몰리터, 킨하이머 후베르투스라이 리슬링 아우스레제** 2018 Marcus Molitor, Kinheimer Hubertuslay Riesling Auslese** 2018
잘 익은 과일 풍미가 한층 밝게 드러나는 동시에 영롱한 미네랄이 감돈다. 입에 넣으면 레몬 같은 신맛과 적당한 알코올이 단단한 구조를 형성하며, 열대 과일을 연상시키는 달콤한 과일 향과 가벼운 페트롤 힌트가 매력적으로 어우러진다. 흔히 볼 수 없는, 깔끔한 맛이 매력적인 드라이 아우스레제.
그린 캡슐(오프 드라이)
마르쿠스 몰리터, 옥페너 복슈타인 리슬링 카비넷 2020 Marcus Molitor, Ockfener Bockstein Riesling Kabinett 2020
조약돌을 연상시키는 영롱한 미네랄과 가벼운 허브, 백도와 자두 사탕 같은 아로마. 입에 넣으면 강하지 않은 신맛이 시트러스 같은 산미와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 완벽한 편안함을 선사한다. 와인만 즐겨도 좋지만, 스파이시한 동남아 음식이나 중국 요리, 한식과 함께 마시면 최고의 궁합을 선사할 와인이다.
마르쿠스 몰리터, 젤팅어 힘멜라이히 리슬링 아우스레제 2018 Marcus Molitor, Zeltinger Himmelreich Riesling Auslese 2018
황도 같이 완숙한 노란 핵과 풍미가 단정하게 드러나며, 둥근 질감을 타고 입안까지 이어진다. 핵과류의 과일 풍미에 곁들여지는 가벼운 단맛은 상큼한 신맛을 살짝 눌러 주며, 꿈결 같은 편안함이 피니시까지 길게 이어진다. 오프 드라이 리슬링의 매력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와인으로, 매끈한 질감이 선사하는 우아함이 인상적이다.
골드 캡슐(스위트)
마르쿠스 몰리터, 위르지거 뷔르츠가르텐 리슬링 카비넷 2018 Marcus Molitor, Urziger Wurzgarten Riesling Kabinett 2018
특유의 스파이스와 함께 성냥을 태운 듯한 스모키 미네랄 힌트가 아주 가볍게 스친 후, 곧바로 드러나는 잘 익은 과일 풍미와 상쾌한 허브 뉘앙스. 입에 넣으면 방순한 백도와 흰 자두, 시원한 한국산 배 같은 청량함이 피니시까지 이어진다. 완연한 단맛과 강한 신맛이 완벽한 밸런스를 이루기 때문에 10년 이상의 장기 숙성이 가능한 와인이다. 다니엘 씨는 스위트한 카비넷을 '어른들의 레모네이드'라고 소개했다. 단맛이 있는 데다 알코올 도수도 낮기 때문에 아침에 마셔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한다. 특히 계란 프라이, 구운 베이컨과 함께 마시면 완벽한 궁합을 보인다며 강력 추천했다.
마르쿠스 몰리터, 젤팅어 손넨우어 리슬링 슈페트레제 2018 Marcus Molitor, Zeltinger Sonnenuhr Riesling Spatlese 2018
톡 쏘는 미네랄이 스친 뒤 완숙한 과일 아로마가 화사하게 피어난다. 입에서는 물이 많은 서양배와 백도 등 흰 과육의 풍미가 깔끔하고 섬세하다. 제법 진한 단맛은 입안을 부드럽게 감싸안는 반면, 강렬한 신맛은 입안의 긴장감을 유지시킨다. 아로마와 풍미의 밀고 당김이 인상적이며 좋은 구조와 밸런스를 지닌 와인이다.
마르쿠스 몰리터, 자부르거 라우쉬 리슬링 아우스레제 2017 Marcus Molitor, Saarburger Rausch Riesling Auslese 2017
설탕으로 코팅한 말린 자두, 벌꿀 같은 달콤한 풍미가 처음부터 은은하게 드러난다. 입에 넣으면 명확한 단맛 사이로 강한 산미가 뚫고 나와 깔끔한 여운을 선사한다. 놀랍게도 무겁지 않고 산뜻하며 알싸한 여운을 남기는 아우스레제. 과하지 않은 달콤함이 단정하게 드러나 품격 있는 자리의 디저트 와인으로 적당하다. 30년 이상 장기 숙성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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