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애정하는 시칠리아 와인, 돈나푸가타. 개인적으로 와인의 레이블도 상당히 중요시하는데, 이들의 레이블은 시칠리아적인 감성과 와인의 특징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 자주 좋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오너 와인메이커의 어머니가 와인을 맛보고 느낀 감성을 예술가를 통해 레이블에 표현하기 때문이라고. 누나 또한 음악을 하는 분이라 와인과 문화가 고스란히 융합되는 모습을 보일 수 밖에 없다. 오너 내외는 대단히 순박하면서도 와인에 대한 열정이 넘치는 분들. 이번 방한에서는 그들의 에트나 와인을 소개했는데, 정말 훌륭했다. 특히 에트나는 레드에 비해 화이트에 감흥을 느끼는 경우가 많은데(어디서 들은 바에 따르면 카리칸테 품종의 특징이 충분히 표현되려면 다소간의 수성이 필요하다고), 돈나푸가타의 화이트 와인은 충분한 숙성 잠재력이 드러나면서도 즉각적인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와인이었다. 음.. 역시 와잘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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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나푸가타(Donnafugata), 시칠리아의 사랑과 정열을 와인에 담다
돈나푸가타의 와인은 레이블만 봐도 뭔가 독특하다.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맑은 하늘과 반짝이는 태양, 그리고 시칠리아 사람들의 정열이 모두 느껴진달까. 소재 또한 온갖 신화와 전설적인 스토리들로 가득해 그리스-로마, 기독교, 이슬람 등 다양한 문화가 뒤섞여 만들어 낸 시칠리아만의 독특함 감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레이블만 봐도 돈나푸가타 와인에 대한 기대감이 물씬 피어나는 이유다.
한국을 찾은 돈나푸가타 CEO이자 와인메이커 안토니오 랄로(Antonio Rallo) 씨 부부를 만났다. 그들은 팬데믹이 끝나자마자 한국을 찾았을 정도로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 시장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인상을 받았다. 안토니오 랄로 씨는 '좋은 와인, 맛있는 음식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신나게 즐길 줄 아는 한국 사람들의 성향은 시칠리아 사람들과 매우 닮았다'며 친밀감을 표현했다. 돈나푸가타는 2002년부터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나라셀라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한국 시장에서 시칠리아를 대표하는 와인으로 완전히 자리매김했다. 한국의 와인 애호가들 또한 이탈리아의 최정상급 와인 생산자 협회 '그란디 마르키(Grandi Marchi)'의 멤버인 돈나푸가타의 가치를 진즉에 알아보고 꾸준한 사랑을 보내고 있다.
시칠리아는 지중해에서 가장 큰 섬이다. 서쪽 끝에 위치한 도시 마르살라(Marsala)에서 동북쪽 끝의 메시나(Messina)까지 거리는 거의 300km에 육박한다. 포도밭의 면적은 약 98,000 헥타르. 독일이나 남아공 전체 포도밭보다 넓고 뉴질랜드 포도밭 넓이의 세 배나 된다. 게다가 시칠리아는 3천 년이 넘는 오랜 포도 재배 및 양조 전통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각 지역 별 테루아에 맞는 70여 종의 토착 품종이 존재한다. 그중에는 국내에도 잘 알려진 네로 다볼라(Nero d'Avola)를 비롯해 남쪽의 모래 토양에서는 프라파토(Frappato), 동쪽의 화산토양에서는 네렐로 마스칼레제(Nerello Mascalese) 등 최근 주목받는 품종들이 다수 포함돼 있다.
돈나푸가타 또한 시칠리아 주요 지역에 총 461헥타르의 넓은 포도밭을 보유하고 각각의 테루아를 드러내는 와인들을 만든다. 1951년 설립한 돈나푸가타는 1983년 안토니오의 아버지 자코모 랄로(Giacomo Rallo) 때부터 돈나푸가타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돈나푸가타는 '피난처의 여인'이라는 뜻으로, 19세기 나폴리의 왕이었던 페르디난도 4세의 부인 마리아 카롤리나가 현재는 돈나푸가타의 핵심 와이너리인 콘테사 엔텔리나(Contessa Entellina)가 된 건물에 피난을 와 머물렀던 일화에서 착안한 이름이다. 콘테사 엔텔리나는 돈나푸가타의 시작점인 마르살라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전 세계적으로 돈나푸가타의 명성을 드높인 밀레 에 우나 노테(Mille e Una Note) 등 다양한 와인들을 생산하고 있다. 1989년에는 시칠리아 남쪽 판텔레리아(Pantelleria) 섬에 진출했다. 시칠리아를 제주도에 비유하자면 판텔레리아는 마라도 같은 섬이다. 거친 화산토로 뒤덮이고 강한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판텔레리아 섬에서 돈나푸가타는 지비보(Zibibbo)라고 부르는 모스카토(Moscato d'Alexandria) 품종을 사용해 이탈리아 최고의 디저트 와인 벤 리에(Ben Rye)를 생산한다. 2016년부터는 비토리아(Vittoria)와 에트나(Etna)에서도 와인을 만든다. 돈나푸가타가 비토리아에서 프라파토, 네로 다볼라 품종으로 양조하는 향긋하고 영롱한 레드 와인들은 주목할 가치가 충분하다.
이날의 핵심은 에트나였다. 에트나는 시칠리아 섬 동쪽 끝에 위치한 유럽에서 가장 큰 활화산 지역이다. 2021년 폭발이 일어났을 정도로 주기적으로 용암을 분출하고 있으며, 1981년의 대폭발은 최상급 포도밭을 250 헥타르나 덮어 버렸다고 한다. 돈나푸가타도 1983년 에트나의 작은 밭을 계약하려고 했었는데, 계약 직전 화산 폭발로 인해 포도밭이 사라져 버린 아찔한 경험이 있었다. 일련의 사건들로 진출이 늦어지긴 했지만, 현재 돈나푸가타가 보유한 에트나 포도밭은 총 35 헥타르에 이르며 그중에는 최고 100년 수령의 고목도 있다. 청포도 품종은 카리칸테(Carricante), 적포도 품종은 네렐로 마스칼레제를 중심으로 네렐로 카푸치오(Nerello Cappuccio)를 일부 사용한다.
처음 맛 본 와인은 술 불카노 에트나 로사토 2021(Sul Vulcano Etna Rosato 2021). 네렐로 마스칼레제 100%로 만든 로제 와인이다. 로제 와인용 포도는 레드 와인보다 2주 정도 이른 9월 말쯤 수확해 신선한 과일 풍미와 싱그러운 신맛, 화산토에서 오는 미네랄 뉘앙스에 초점을 맞춘다고 한다. 실제 맛을 보니 향긋한 꽃향과 스모키 힌트의 미네랄리티가 도드라지며, 생생한 신맛과 짭조름한 미감이 입맛을 돋우는 와인이었다. 안토니오 씨는 산미가 강하기 때문에 화이트 와인보다 먼저 마시는 것이 좋으며, 식전주로 아주 적당하다고 말했다. 10℃의 저온에서 6-12시간 정도 침용해 아름다운 핑크 컬러를 뽑아낸 후 온도 조절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발효해 스테인리스 혹은 콘크리트 탱크에서 3개월, 병입 후 2개월 숙성해 출시한다.
다음 와인은 술 불카노 에트나 비앙코 2019(Sul Vulcano Etna Bianco 2019). 카리칸테 100%로 만든 화이트 와인이다. 잔에 따르니 은은한 오크 뉘앙스와 함께 신선한 허브와 가벼운 노란 과일 풍미가 매력적으로 어우러졌다. 입에 넣는 순간, 부드럽고 우아하며 조화로운 인상에 개인적으로 마셔 본 에트나 화이트 와인 중 가장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토니오 씨는 카리칸테가 아로마가 도드라지는 품종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화산 토양의 테루아를 온전히 드러내기에 아주 좋은 품종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잠재력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해 빠르게 소비할 수 있는 스타일보다는 어느 정도 구조감과 깊이가 있는 스타일을 추구했다고 한다. 그렇기에 술 불카노 에트나 비앙코는 바로 마셔도 좋지만, 10년 이상 숙성해서 즐기면 또 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와인이다. 14-16℃의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발효 후 일부는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 나머지는 키아란다(Chiarandà), 라 푸가(La Fuga) 등 돈나푸가타의 샤르도네 와인을 숙성했던 프렌치 오크에서 10개월 숙성하고 병입한 다음 9개월 추가 숙성한다. 참고로 2019년은 신이 내린 완벽한 빈티지였다고 한다. '포도가 너무 좋아서 수확해서 파쇄만 하면 저절로 와인이 되었기 때문에 어린이라도 잘 만들었을 빈티지'라고 하니, 2019년 빈티지의 에트나 와인을 보면 놓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참고로 술(Sul)은 영어로 'on'과 같은 의미다. 술 불카노(Sul Vulcano)는 '화산 위에서'라는 뜻인데, 활화산인 에트나에서 생산하는 와인의 성격을 정말 잘 반영하는 이름이다. 원래 이탈리아어로 화산은 남성 명사인데, 에트나 화산은 왜인지 여성 명사라고 한다. 돈나푸가타의 에트나 와인 레이블 은 지역적 성격은 물론 이런 특성과도 아주 잘 맞아떨어진다는 생각이 든다.
술 불카노 에트나 로쏘 2017(Sul Vulcano Etna Rosso 2017)은 네렐로 마스칼레제에 네렐로 카푸치오를 일부 블렌딩해 만들었다. 8월에 일부 그린 하비스트를 한 후 앞서 언급한 대로 레드 와인용 포도를 수확하기 2주 전에 로제 와인용 포도를 먼저 수확하기 때문에, 레드 와인에 사용하는 포도는 풍미의 밀도가 더욱 높아지고 타닌 또한 훨씬 부드럽게 농익는다. 로제 와인과 레드 와인 모두의 개성을 살리고 품질 또한 높이는 합리적인 방법인 셈이다. 고혹적인 붉은 꽃 향기와 딸기, 체리 같은 붉은 베리 풍미가 신맛과 함께 잔잔하게 드러나 에트나 레드 본연의 스타일을 표현한다. 25℃의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8-10일 정도 침용 및 발효 후 일부는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 나머지는 재사용 프렌치 오크에서 14개월 숙성해 병입하여 7개월 추가 숙성한다.
프라고레 에트나 로쏘 2018(Fragore Etna Rosso 2018)은 크뤼급 와인이다. 에트나는 전반적으로 강수량이 적은 곳이지만, 특히 에트나 북부 지역은 더욱 강수량이 적다. 프라고레는 에트나 북쪽에서도 최상급 밭 중 하나인 몬텔라구아르디아(Contrada Montelaguardia)라는 크뤼에서 재배한 네렐로 마스칼레제 품종만 사용한다. 때문에 에트나의 테루아를 더욱 밀도 높게 표현한다. '프라고레(fragore)'는 화산에서 나는 소리를 뜻하는 단어인데, 이 와인을 맛본 안토니오 씨의 어머니가 다른 와인에 비해 확실히 화산토의 개성이 강하게 드러난다는 느낌을 받아 이름과 레이블을 이렇게 정했다고 한다. 실제로 밀도 높은 검붉은 베리 풍미와 함께 오묘한 스파이스, 약재 향과 검은 돌과 같은 미네랄리티가 느껴진다. 신선한 신맛을 동반한 복합적인 풍미와 탄탄한 구조감, 은은하게 감도는 오크 힌트는 장기간의 숙성 잠재력 또한 드러낸다. 25℃의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10-12일 정도 침용 및 발효 후 일부는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 나머지는 재사용 프렌치 오크에서 14개월 숙성해 병입하여 18개월 추가 숙성한다.
에트나 지역에 집중하는 자리였지만, 돈나푸가타를 대표하는 와인들을 맛보지 않으면 섭섭하다. 밀레 에 우나 노떼 2018(Mille e una Notte 2018)은 네로 다볼라 품종을 중심으로 쁘띠 베르도(Petit Verdot)와 시라(Syrah) 등을 소량 블렌딩한 와인이다. 1995년 슈퍼 투스칸의 아버지로 불리는 자코모 타키스(Giacomo Tachis)와 함께 첫 빈티지를 출시한 이래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와인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완숙한 검은 과일 풍미와 발사믹한 뉘앙스, 복합적인 허브와 스파이스 힌트가 <아라비안 나이트>처럼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26-30℃의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12일 동안 침용 및 발효 후 새 프렌치 바리크에서 13-14개월 숙성해 병입하여 24개월 이상 추가 숙성한다. 20년 이상 숙성할 수 있는 시칠리아 최고급 와인 중 하나. 벤 리에 2020(Ben Rye 2020)은 판텔레리아 섬에서 재배한 지비보 품종을 햇볕과 바람으로 건조하는 파시토(Passito) 방식으로 만드는 디저트 와인이다. 벤 리에의 뜻이 '바람의 아들'이라는 것만 봐도 판텔레리아의 거센 바람을 짐작할 수 있다. 덕분에 벤 리에는 생생한 신맛이 밀도 높은 말린 과일 풍미, 진한 단맛과 조화를 이뤄 깔끔한 여운을 선사한다. 언제 마셔도 큰 만족감을 주는 빼어난 스위트 와인. 발효하는 데만 1달 이상이 소요되며,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8개월, 병입 후 12개월 숙성한다.
와인메이커인 안토니오 씨는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를 따라 와인 셀러와 포도밭을 돌아다니며 놀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한다. 이런 경험은 다음 세대를 위한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에 대한 고려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와이너리의 탄소 배출량과 물 사용량에 대한 인증(Carbon and Water Footprint certified)을 받았으며, 2021년에는 시칠리아 지속가능 재단(Fondazione SOStain Sicilia)에도 가입했다. 또한 돈나푸가타는 화학비료나 제초제 등도 전혀 사용하지 않는데, 이는 최고의 와인을 만들기 위한 방법과도 연계된다고 믿는다.
돈나푸가타는 시칠리아 예술과의 조화를 통해 지역성을 더욱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돈나푸가타 와인의 멋진 레이블들은 안토니오 씨의 어머니 가브리엘라 랄로(Gabriella Rallo) 씨가 와인을 테이스팅 한 후 받은 영감을 컬러와 이미지 등으로 표현하면, 화가인 스테파노 비탈레(Stefano Vitale) 씨가 시칠리아적인 감성을 담아 그린 것이라고 한다. 이런 노력은 음악으로도 이어진다. 안토니오 씨의 누나이자 공동 CEO인 호세 랄로(Josè Rallo)씨는 남편과 함께 2002년부터 돈나푸가타의 와인과 음악을 연계한 프로젝트를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호세 랄로 씨가 직접 노래를 부르고 공연에도 참여하는데, 이미 세 장의 앨범을 내고 뉴욕, 베이징, 상하이, 아테네 등에서 공연을 진행했다고 한다. 조만간 한국에서도 그들의 음악을 들을 수 있길 기대해 본다. 물론, 돈나푸가타의 매력적인 와인과 함께. 치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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