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신세계 그룹의 회식 같은 분위기에서 진행된 디너. 그런 와중에 와인들은 또 얼마나 맛있고 훌륭한지. 특히 홍일점(?)이었던 화이트 와인은 예상외의 감동을 선사했다. 힐사이드 셀렉트는 어마어마한 밀도임에도 부담감이 하나도 없이 술술 넘어간다. 한 20년 묵히면 어떻게 변화할지 궁금할 지경. 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원 포인트 파이브. 정말 딱 좋아하는 스타일의 나파 와인이다. 완전히 개인적인 관점에서 조셉 펠프스, 스택스 립 와인 셀러와 함께 리즈너블(?)한 가격대에서 접근 가능한 프리미엄 나파 와인이 바로 쉐이퍼가 아닐까 싶다는. 또한 나의 스택스 립 선호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 경험이 아니었나 싶다. 혹시 다시 나파에 갈 일이 생긴다면 꼭 들러 보고 싶은 와이너리.
원문은 wine21.com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본 포스팅은 작성자 본인이 저장용으로 스크랩한 것입니다.
클래식 나파 밸리 와인의 품격은 영원히, 쉐이퍼 빈야드(Shafer Vineyards)
올해 2월, 영국 와인 전문지 <디캔터(Decanter)>를 읽다가 눈이 번쩍 뜨였다. 쉐이퍼 빈야드(Shafer Vineyards)가 신세계 그룹 소유가 된다는 기사였다. 쉐이퍼가 어떤 와이너리인가. 아이콘 와인 힐사이드 셀렉트(Hillside Select)가 로버트 파커(Robert M. Parker Jr.)로부터 6번이나 100점을 받은 것으로 유명한 나파 밸리의 최정상급 와이너리 아닌가. <와인 스펙테이터(Wine Spectator)>는 21세기가 시작되는 시점에 할란, 스크리밍 이글 등과 함께 쉐이퍼를 미국 9대 컬트 와이너리로 언급하기도 했다. 이런 엄청난 명성의 와이너리가 한국 기업 소유가 된다니, 참으로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9월, 이제는 쉐이퍼 빈야드의 고문이 된 전 소유주 더그 쉐이퍼(Doug Shafer) 씨가 한국을 방문해 직접 한국 와인 애호가들을 만나는 자리를 가졌다. 그의 나이를 고려할 때 이번 방문이 마지막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번에 한국에 와서 그가 친필로 서명한 138병의 와인이 더욱 귀중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쉐이퍼 빈야드는 원래 출판업자였던 존 쉐이퍼(John Shafer)가 50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와인 양조의 오랜 꿈을 실현하기 위해 1972년 나파 밸리에 설립한 와이너리다. 쉐이퍼 빈야드가 자리를 잡은 스택스 립 디스트릭트(Stags Leap Distict)는 힘 있으면서도 우아하고 섬세한 카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이 나오는 곳으로 유명한 지역이다. 그는 1974년까지 이곳의 바위 투성이 언덕을 개간해 카베르네 소비뇽을 심어 포도밭을 일구고 1978년에야 첫 빈티지를 출시했다. 이때까지는 아직 '힐사이드 셀렉트'라는 이름을 얻기 전. 힐사이드 셀렉트는 이름이 붙은 것은 아들 더그가 1983년 와인메이커로 합류하면서부터다. 그는 1982년 포도밭 중에서도 선스팟(Sunspot) 구획에서 생산한 와인의 품질이 특별히 뛰어나다는 것을 깨닫고, 해당 와인만 별도로 리저브 카베르네(Reserve Cabernet)로 출시했다. 그리고 1983년 빈티지부터 이름을 변경했는데,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힐사이드 셀렉트다.
더그 쉐이퍼 씨는 아버지가 쉐이퍼를 설립한 이래 한스 코넬(Hanns Kornell), 로버트 몬다비(Robert Mondavi) 등에서 일하며 와인 업계를 경험했고, 레이크스프링 와이너리(Lakespring Winery)에서 어시스턴트 와인메이커로서 양조 경력까지 쌓았다. 그는 초창기 와인메이커로서 쉐이퍼의 스타일을 정립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포도밭의 자연적인 테루아와 빈티지마다의 개성을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었는데, 이는 "포도 스스로 스타일을 드러내게 하라”는 와인 철학으로 요약할 수 있다. 때문에 쉐이퍼의 힐사이드 셀렉트는 스택스 립 디스트릭트 카베르네 소비뇽의 전형적인 특징인 싱그러운 과일 향, 촘촘하면서도 실키한 타닌에서 유래한 비단 같은 질감, 견고한 구조감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쉐이퍼 하면 떠오르는 품질, 일관성, 우아함이라는 키워드는 온전히 그의 손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는 쉐이퍼 와이너리뿐만 아니라 지역 자연을 보호하고 지역 전체가 발전하는 데도 크게 공헌했다. 카르네로스(Carneros) 지역에 28헥타르의 포도밭을 조성하면서 지속 가능한 농법(sustainable viticulture)을 본격 도입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이는 쉐이퍼가 만드는 레드 숄더 랜치 샤도네이(Red Shoulder Ranch Chardonnay)라는 와인의 이름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레드 숄더는 카르네로스에 서식하는 붉은 어깨를 지닌 매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이 매는 설치류 개체수 조절 등을 통해 생태계 선순환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동물이다. 쉐이퍼는 매와 부엉이 등이 서식하기 좋은 환경을 조성하고 피복작물을 심는 등 스택스 립 디스트릭트와 카르네로스의 생태계를 보호하는 동시에 자연 친화적인 농법을 적용하기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 또한 그는 스택스 립 디스트릭트가 미국 공식 원산지 표기인 AVA(American Viticultural Area)로 지정되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1994년, 아버지 존이 회장이 되면서 더그 쉐이퍼 씨는 쉐이퍼의 대표로 취임했다. 그리고 1984년부터 어시스턴트 와인메이커로 함께 일해 온 엘라이아스 페르난데즈(Elias Fernandez)가 와인메이커가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쉐이퍼 또 다른 역사의 장을 열어가기 시작한다. 1995년엔 앞서 언급한 레드 숄더 랜치 샤도네이 1994년 빈티지를 처음 출시했으며, 2002년엔 스택스 립 디스트릭트 바로 남쪽 베커 마운틴스(Vaca Mountains) 산자락의 포도밭에 심어진 시라(Syrah)와 쁘띠 시라(Petit Sirah)로 릴렌틀리스(Relentless) 1999년 빈티지를 출시했다. '타협하지 않는다'는 뜻의 릴렌틀리스라는 이름에는 이 와인을 만들기 위해 외골수처럼 정진했던 와인메이커 엘라이아스 페르난데즈에 대한 헌정의 의미가 담겨 있다. 릴렌틀리스 2008년 빈티지는 2012년 <와인 스펙테이터> 100대 와인의 꼭대기에 올라서며 그 품질을 인정받기도 했다.
그는 또한 스택스 립 디스트릭트 내 10헥타르의 목초지를 추가로 매입해 빼어난 카베르네 소비뇽 포도밭으로 개간했다. 2004년 빈티지로 첫 출시한 원 포인트 파이브(One Point Five)는 이 포도밭에 기반한 것인데, 아버지와 자신을 함께 '1.5세대'라고 지칭함으로써 유대감을 표현했다. 아버지에 대한 경의는 2017년 첫 출시한 TD-9에서도 잘 드러난다. TD-9은 쉐이퍼 설립 초기 사용하던 트랙터 이름으로, 존 쉐이퍼는 이 트랙터를 타고 출퇴근까지 했다고 한다. 아버지의 도전 정신과 열정에 대한 찬사를 와인 이름에 담아낸 것이다. 이런 의미 있는 와인들을 통해 쉐이퍼 빈야드의 포트폴리오는 한층 탄탄해지고, 더욱 많은 사람들이 쉐이퍼의 다양한 와인들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쉐이퍼 빈야드는 신세계 그룹의 소유가 되었다. 하지만 그 이외에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더그 쉐이퍼 씨는 고문으로 쉐이퍼 빈야드에 지속적인 도움을 줄 것이며, 와인메이커 엘라이아스 페르난데즈를 비롯해 포도밭 관리팀과 양조팀도 모두 그대로 남는다. 쉐이퍼 빈야드의 재배 및 양조 노하우가 고스란히 보전되는 것이다. 더그 쉐이퍼 씨는 “와이너리 소유권을 넘기고 나니 가족들이 가장 좋아했다.”는 말로 그동안의 고충과 스트레스를 간접적으로 표현했다. '왕관을 쓴 자, 그 무게를 견뎌라'라는 격언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이야기를 하는 그의 얼굴은 시원함과 섭섭함이 교차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강한 어조로 이야기한 이 말만큼은 가슴에 남는다.
“이제 새로운 장이 열립니다(Here's the new chapter).”
쉐이퍼 빈야드가 펼칠 새로운 장을 응원한다.
쉐이퍼, 레드 숄더 랜치 샤도네이 2021 Shafer, Red Shoulder Ranch Chardonnay 2021
은은한 흰 꽃과 싱그러운 허브, 백도, 흰 자두 등 완숙했지만 과하지 않은 과일 향기가 적절한 오크 뉘앙스와 어우러져 조화롭게 드러난다. 입에 넣으면 멜론 같은 열대과일, 핵과 풍미가 산뜻한 레몬 산미와 영롱한 미네랄 힌트와 함께 신선한 미감을 남긴다. 버터리 오크 뉘앙스가 과한 여느 나파 샤도네이와는 결이 다른 산뜻함이 매력적인 와인. 쉐이퍼 하면 레드 와인을 떠올렸던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선사했던 화이트 와인이다.
카르네로스의 레드 숄더 렌치에서 재배한 샤르도네 100%로 양조해 75%는 새 프렌치 오크 배럴, 25%는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14개월 동안 숙성했다. 덕분에 신선한 과일 풍미와 은근한 오크 뉘앙스가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룬다.
쉐이퍼, TD-9 2019 Shafer, TD-9 2019
라즈베리, 블랙베리, 검은 체리, 블랙커런트 등 다양한 베리 풍미와 매콤한 스파이스, 은은한 오크 힌트가 우아하게 드러난다. 입에 넣으면 고급 홍차잎 같은 뉘앙스와 감초 같은 약재 향이 완숙한 베리 풍미를 감싸 안는 느낌. 정제된 타닌과 산뜻한 신맛 덕분에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생동감 넘치는 매력적인 레드 와인.
스택스 립 디스트릭트, 욘트빌(Yountville), 베커 마운틴스에서 재배한 카베르네 소비뇽 55%, 메를로(Merlot) 33%, 말벡(Malbec) 8%, 쁘띠 베르도(Petit Verdot) 4%로 양조해 100% 새 프렌치 오크 배럴에서 20개월 숙성한다.
쉐이퍼, 원 포인트 파이브 2019 Shafer, One Point Five 2019
매콤한 스파이스와 블랙커런트 풍미, 민트 허브가 도드라지며 시원한 첫인상을 드러낸다. 입에 넣으면 블랙베리, 라즈베리 등 풍성한 과일 풍미에 삼나무와 흑연, 섬세한 오크 터치가 더해져 최적의 밸런스를 이룬다. 부드러운 타닌과 싱그러운 신맛이 만들어내는 견고한 구조와 길게 이어지는 여운은 스택스 립 디스트릭트 와인의 정수를 보여준다. 누구라도 좋아할 수밖에 없는 와인.
스택스 립 디스트릭트에 위치한 힐사이드 에스테이트 빈야드와 3km 정도 남쪽에 있는 보더라인 빈야드(Borderline Vineyard)에서 재배한 카베르네 소비뇽 83%, 메를로 12%, 말벡 3%, 쁘띠 베르도 2%로 양조해 100% 새 프렌치 오크 배럴에서 20개월 숙성한다. 더그 쉐이퍼 씨는 '와인 이름이 '원 포인트 파이브(1.5)'이다 보니 1.5리터 매그넘 보틀인 줄 알고 주문하는 경우도 많았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어린 빈티지라도 디캔팅 할 필요 없이 30분 전에만 열어놓으면 그 풍미를 온전히 즐길 수 있다고 한다. 그의 말대로 이날도 엄청난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쉐이퍼, 릴렌틀리스 2018 Shafer, Relentless 2018
정향과 시나몬, 화한 민트 허브가 완벽하게 익은 검은 베리 풍미와 함께 밀도 높은 아로마를 선사한다. 입에 넣으면 실키한 질감을 타고 진한 검은 과일 풍미와 은은한 토양 힌트, 복합적인 스파이스와 플로럴 허브 뉘앙스가 화사하게 드러난다. 쉐이퍼의 다른 레드 와인들과 스타일의 연장선상에 있으면서도 독특한 개성을 보여 주는 와인. 프랑스 북부 론의 코트 로티(Cote Rotie) 스타일을 지향하며 만들었다고 한다.
스택스 립 디스트릭트 바로 남쪽에 위치하여 비교적 서늘한 기후를 보이는 베커 마운틴스에서 재배한 시라 76%, 쁘띠 시라 24%로 양조해 100% 새 프렌치 오크 배럴에서 30개월 숙성한다. 2018년은 릴렌틀리스 출시 20주년이 되는 빈티지다.
쉐이퍼, 힐사이드 셀렉트 2018 Shafer, Hillside Select 2018
블랙커런트, 블랙베리, 붉은 자두와 베리류의 풍미가 엄청난 밀도로 뿜어져 나오며 민트, 후추, 라벤더, 은은한 토양과 흑연 뉘앙스가 곁들여진다. 그러면서도 단정하고 온화한 인상이라 신비로운 느낌. 입에 넣으면 완숙한 과일 풍미와 발사믹 뉘앙스, 벨벳 같은 타닌과 어우러지는 신선한 신맛이 끝없는 여운을 선사한다. 그저 감탄할 수밖에 없는, 완벽에 가까운 아름다운 와인. 2018 빈티지에 와인 평론가 젭 더넉(Jeb Dunnuck)은 100점을 주었고, 제임스 서클링(James Suckling)은 99점, 로버트 파커는 98점을 주었다.
연간 2,400 케이스 정도 극소량만 생산하는 쉐이퍼 빈야드의 아이콘 와인이자 최고의 걸작 와인이다. 선스팟을 비롯해 존스 어퍼 세븐(John's Upper 7), 베나도 일레갈(Venado Ilegal), 파이어브릭(Firebreak) 등 쉐이퍼 힐사이드 빈야드의 4개 구획에서 수확한 100% 카베르네 소비뇽으로 양조해 100% 새 프렌치 오크 배럴에서 32개월 숙성한다. 2018년은 쉐이퍼 빈야드에서 와인을 출시한 지 40주년이 되는 기념적인 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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