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명가들 중 대중 와인을 만드는 경우가 많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경제적인 이슈도 제법 크다. 값비싼 프리미엄 와인을 만들면 돈을 많이 벌 것 같지만, 생산비가 많이 들고 생산량은 적기 때문에 의외로 돈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경영권 이슈인 경우로 독립해 새로운 회사를 세우는 경우도 있다. 로랑 퐁소는 두 번째 경우에 가까운데, 이미 프리미엄 와인의 반열에 올랐다. 부르고뉴에서 손꼽히는 대가였으니, 당연한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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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트 쿠튀르 부르고뉴 와인, 로랑 퐁소(Laurent Ponsot)
오트 쿠튀르(haute couture). 고급 맞춤 의상을 뜻하는 패션 용어다. 1년에 두 번 파리에서 열리는 같은 이름의 패션쇼는 계절에 앞서 새로운 의상을 발표하고, 이는 곧 전 세계 패션 트렌드가 된다. 로랑 퐁소(Laurant Ponsot)가 지향하는 것은 바로 오트 쿠튀르와 같은, 부르고뉴의 성격과 지향점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와인을 만드는 것이다. 설 연휴가 얼마 남지 않은 2024년 2월, 에노테카코리아가 주최한 로랑 퐁소 와인 마스터클래스가 WSA 아카데미에서 진행됐다. 이번 마스터클래스는 한국을 방문한 로랑 퐁소로부터 직접 설명을 들으며 함께 와인을 테이스팅할 수 있었던 귀중한 자리였다.
로랑 퐁소는 부르고뉴 최고 생산자 중 하나로 손꼽히는 도멘 퐁소(Domaine Ponsot)에서 4대 와인메이커로 36년 동안 일했다. 그는 2017년 도멘을 떠나 장남 클레망(Clement)과 함께 클로 드 부조(Clos de Vouget) 근처 지이 레 시토(Gilly-Les-Citeaux)에 자신의 이름과 같은 와이너리를 설립했다. 부르고뉴의 유서 깊은 가문에서 갈라져 나왔지만 와이너리 자체는 신생인 셈이다. 로랑 퐁소 와인은 레이블부터 일반적인 부르고뉴 와인과는 확연히 다르다. 메탈릭한 배경 위에 녹색과 검은색 글씨가 간결하게 적혀 있어 미래지향적인 느낌을 준다. 녹색은 포도나무의 싹을, 검은색은 와인을 양조하고 숙성하는 와인 셀러를 상징한다. 로랑 퐁소는 와이너리 로고의 “P에서 뻗어나간 줄기는 미국 시장을, L에서 뻗어나간 줄기는 아시아 시장을 향하는 것”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위 동영상을 보면 알 수 있듯 와이너리 또한 최첨단이다. 미국이나 남미에 새로 건립한 와이너리가 아닌가 싶을 정도다. 레 자틀리에 퐁소(Les Ateliers Ponsot)라는 이름의 모던한 건물에는 이탈리아에서 공수한 최첨단 설비들이 가득 차 있다. 모든 공간은 먼지 하나 없이 청결하고 단정하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고전적인 부르고뉴 와이너리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로랑 퐁소는 부르고뉴 와인의 역사와 전통을 존중하며, 부르고뉴 와인의 정체성을 고스란히 담은 와인을 추구한다. 최첨단 설비는 이를 확실히 구현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그는 와인 양조가로서 와인에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을 명확히 실행하고 싶어 한다. 그렇다고 와인에 이것저것 손을 댄다는 얘기는 아니다. 반대로 와인이 스스로 발효되고 숙성되며 자신을 표현할 수 있도록 간섭을 최소화한다.
그는 산소, 높은 온도 그리고 박테리아 등 세 가지가 와인의 가장 큰 적이라는 것을 반복적으로 강조했다. 때문에 위생에 철저하다. 그리고 양조 전 과정에서 와인을 산소로부터 완벽히 보호하며, 꼭 필요할 때만 접촉한다. 병입 시에도 질소 가스를 넣어 산화를 방지한다. 발효조는 그가 직접 디자인한 온도를 조절할 수 있는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를 사용한다. 레드 와인 발효조는 원통형이다. 레드 와인을 침용할 동안 압착한 포도 잔여물이 항상 젖어 있어야 하는데, 발효 중 발생하는 열과 탄산 때문에 위로 떠올라 건조해지기 쉽다.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피자주(Pigeage, punching down)를 해서 포도 잔여물을 포도즙 아래로 가라앉히지만, 얼마 되지 않아 금세 떠올라 건조해져 버린다. 하지만 그가 만든 발효조에서는 발효 도중 포도즙의 흐름이 발생하고, 그 흐름을 따라 포도 잔여물들이 이동하며 계속 젖어 있게 된다. 때문에 피자주를 진행할 필요가 없다. 화이트 와인 발효조의 경우 아래쪽이 뾰족한 암포라와 비슷하게 생겼다. 화이트 와인은 맑고 깔끔하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발효 중 발생해 바닥에 쌓이는 세디먼트를 제거하기 쉽도록 아랫부분을 뾰족하게 만든 것이다.
로랑 퐁소는 전송이 발효를 하지 않는다. 잘 익은 포도알만 골라 와인을 만든다. 로랑 퐁소는 줄기와 함께 발효할 때 더해지는 타닌과 풍미, 쓴맛 등을 선호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물론 이는 취향과 지향점의 문제일 뿐 줄기를 사용하는 생산자들을 충분히 존중한다고 한다. 발효 시 줄기를 사용하지는 않지만 청포도 품종을 압착할 때는 포도즙을 원활하게 얻기 위해 줄기째 압착한다. 숙성 시에는 새 오크를 사용하지 않는다. 오크가 과일 풍미와 테루아를 지나치게 가리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오크의 생산지에 대해서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오크통 품질에서 가장 큰 부분인 밀도만 확인해 오크통을 구입한다. 구입한 오크통은 뜨거운 소금물로 15분 정도 강하게 흔들어 세척한 후 깨끗한 물로 헹궈 소금기를 제거해 사용한다. 로랑 퐁소는 “역사적으로도 새 오크를 쓰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전통으로 회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코르크와 케이스는 최첨단이다. 아르데아 실(ARDEA SEAL)은 로랑 퐁소가 20년 이상 천연 코르크의 대체재를 찾은 끝에 선택한 코르크다. 인공심장에도 쓰이는 신소재로 만들어 안전할 뿐만 아니라 와인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치는 박테리아와 TCA(2,4,6-trichloroanisole) 오염에 강하다. 장기 숙성에도 아무 문제가 없다. 와인을 오픈할 때는 스크루를 코르크가 뚫릴 때까지 깊이 박으면 쉽게 빠진다. 또한 그랑 크뤼와 프리미에 크뤼 와인을 담는 인텔리전트 케이스(Intelligent Case)에는 센서가 부착돼 있어 3시간마다 온도를 기록한다. 와인이 유통되는 동안의 온도 변화 기록을 스마트폰으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와인의 캡슐 안쪽에도 칩이 부착돼 있다. 이 칩에는 와인의 빈티지와 아펠라시옹 등이 기록돼 있어 정확한 정보를 제공함과 동시에 위조를 막는다. 최첨단 코르크와 캡슐, 케이스 모두 와인을 최상의 상태로 고객에게 안전하게 전달하고 싶은 로랑 퐁소의 열망이 담겨 있다.
로랑 퐁소 와인의 중심에는 테루아가 있다. 다만 테루아를 바라보는 관점이 다른 부르고뉴 생산자들과 다를 뿐이다. 그는 포도밭 단위를 넘어 지나치게 파셀 단위로 구분해 와인을 만드는 최근의 추세를 따르기보다는 아펠라시옹(appellation)이나 포도밭을 아우르는 와인을 추구한다. 그는 샴페인에서는 다양한 플롯에서 생산한 여러 퀴베를 블렌딩해 빼어난 와인을 만드는데, 왜 부르고뉴는 그러면 안 되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그래서 그는 최고의 샴페인을 만들듯 믿을 수 있는 재배자들로부터 구매한 포도와 와인을 사용해 아펠라시옹의 특징을 드러내는 와인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말하자면 와이너리의 정체성을 네고시앙(négociant)으로 설정한 것이다. 그는 “1970년대 이후 도멘의 자체 병입이 늘어나기 전까지 부르고뉴의 품질과 명성은 네고시앙들이 만들어 왔다”고 강조했다. 현재는 유명 도멘들에 밀려 네고시앙의 명성이 예전만 못한데, 그렇기 때문에 “네고시앙의 방법으로 돌아가는 것은 혁명적인 상황”이라고 한다. 그는 이런 방식으로 부르고뉴의 전통을 지키는 동시에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네고시앙 오트 쿠튀르를 지향한다.
현재 로랑 퐁소는 13개 그랑 크뤼, 10개 프리미에 크뤼, 5개 빌라주, 2개 레지오날 와인을 만들고 있다. 모두 엄격한 품질 기준에 맞춰 생산하며, 기준에 미치지 않는 와인들은 와이너리 내 증류기로 증류주를 만든다. 마스터클래스에는 2종의 화이트 와인과 3종의 레드 와인을 시음할 수 있었다. 로랑 퐁소는 “함께 시음할 때 테이스팅 노트를 소개하지 않는다”며, 관계자의 설명을 너무 이성적으로 받아들이려 하기보다는 스스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렇게 감성적으로 느껴 본 그의 와인은 너무나 훌륭했다. 한국의 와인 애호가들도 꼭 직접 느껴 보길 바란다.
로랑 퐁소, 부르고뉴 블랑 “퀴베 뒤 페르스 네쥬” Laurent Ponsot, Bourgogne Blanc “Cuvee du Perce-Neige” 2019
밝은 골드 컬러. 흔히 '깨 볶는 향'이라고 표현하는 고소한 뉘앙스와 은은한 오크 힌트가 완숙 핵과, 파인애플 같은 열대 과일, 달콤한 자두 사탕 같은 아로마와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입에 넣으면 정제된 신맛과 드라이한 미감이 깔끔하고 신선한 인상을 남긴다. 도저히 레지오날급 와인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품질. 다양한 음식과 무난히 어우러질 것 같지만, 특히 다양한 치즈와 햄, 크래커 등으로 구성한 샤퀴테리 보드, 주말 오전의 브런치와 함께 마신다면 더욱 좋을 것 같다.
로랑 퐁소, 뫼르소 “퀴베 뒤 판도레아” Laurent Ponsot, Meursault “Cuvée du Pandoréa” 2019
연둣빛이 살짝 감도는 반짝이는 밝은 골드 컬러. '깨 볶는' 힌트가 좀 더 섬세하게 드러나며 상쾌한 삼나무, 달콤한 바닐라와 버터 뉘앙스가 곁들여진다. 입에 넣으면 크리미한 질감을 타고 섬세한 백도 풍미와 생생한 시트러스 신맛이 우아하게 드러난다. 마실수록 드러나는 향긋한 흰 꽃과 영롱한 미네랄리티는 반복적인 감탄사를 이끌어내기 충분하다. 지금 현재도 충분히 매력적이지만, 다년간의 숙성을 통해 변화해 갈 모습이 더욱 궁금한 와인이다. 초밥, 생선회 및 소스를 곁들인 다양한 해산물 요리는 물론 닭이나 돼지고기를 사용한 메인 디시와도 잘 어울릴 와인이다.
로랑 퐁소, 부르고뉴 루즈 “퀴베 데 페플리에” Laurent Ponsot, Bourgogne Rouge “Cuvée des Peupliers” 2018
밝고 투명한 체리 레드 컬러. 풋풋한 허브와 붉은 꽃잎 아로마와 알이 작은 붉은 베리, 라즈베리, 블랙체리 풍미가 밤 같이 구수한 뉘앙스와 하모니를 이룬다. 입에 넣으면 상큼한 신맛과 촘촘한 타닌이 단정한 구조를 형성하며 깔끔한 여운을 남긴다. 부르고뉴 피노 누아의 정수를 느낄 수 있는 와인. 올리브를 곁들인 햄과 소시지 플래터나 가벼운 육류 요리와 잘 어울린다. 편하게 좋아하는 피자 한 판 시켜 함께 마셔도 좋을 와인이다.
로랑 퐁소, 쥬브레 샹베르땅 “퀴베 드 롤른” Laurent Ponsot, Gevrey Chambertin “Cuvee de l'Aulne” 2017
밝고 투명한 루비 컬러. 완숙한 붉은 자두, 딸기, 붉은 베리와 체리 풍미에 고혹적인 붉은 꽃내음이 잔잔하게 감돈다. 입에 넣으면 벨벳 같은 타닌과 온화한 신맛이 견고한 구조감과 부드러운 질감을 선사하며, 짭조름한 미네랄리티, 표고버섯, 가벼운 가죽 힌트와 가벼운 삼나무 향이 긴 여운을 남긴다. 쥬브레 샹베르땅의 정체성을 온전히 담아낸, 중장기 숙성을 통해 아름답게 변화해 갈 와인이다. 진한 소스를 곁들인 쇠고기 스테이크에 안성맞춤이며, 오리고기, 양고기, 참치 요리와도 좋은 궁합을 보인다.
로랑 퐁소, 본 프리미에 크뤼 “퀴베 데 누와이예” Laurent Ponsot, Beaune 1er Cru “Cuvée du Noyer” 2017
맑은 루비 레드 컬러. 장미 같은 붉은 꽃 향기와 매콤한 스파이스 풍미가 야생의 작은 붉은 베리 풍미와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입에 넣으면 검붉은 베리 풍미가 생생한 신맛, 촘촘한 타닌과 어우러져 강건하면서도 순박한 인상을 남긴다. 10년 이상 숙성 가능한 와인으로, 어릴 때는 잔에 따라 두고 서서히 변화하는 모습을 즐기면 좋다. 로랑 퐁소가 꼬뜨 드 본에서 생산하는 유일한 레드 와인으로, 여덟 개의 본 프리미에 크뤼를 블렌딩해 만든다. 로랑 퐁소 씨는 그랑 크뤼를 마시기 전에 맛보기 딱 좋은 와인이라 생각한다고. 스테이크는 물론 바비큐, 갈비찜 등 진한 풍미의 고기 요리와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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