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저녁, 훈제오리구이와 함께 프랑스 남부에서 온 레드 한 병 오픈. 직전에 마신 레드우드 크릭 샤르도네와 함께 홈플러스에서 구매한 녀석이다.
물랭 드 가삭 길렘(Moulin de Gassac Guilhem) 레드. 와인 애호가라면 누구나 알 만한 이름, 마스 드 도마스 가삭의 에브리데이 와인.
마스 드 도마스 가삭(Mas de Daumas Gassac)은 랑그독(Languedoc) 지방의 명성 높은 생산자다. 역사는 1970년대부터 시작되었는데 원래는 장갑 제조업자였던 에메 기베르(Aime Guibert) 부부가 살 집을 살다가 에로(Hérault) 지역에서 적당한 곳을 발견했다. 원래 주인의 성이 도마스(Daumas), 부근에 흐르는 강 이름이 가삭(Gassac). 그래서 도마스 가삭이다. 원래부터 와인을 만들 생각은 없었고 소유지에 뭘 심을까 고민하던 차에 마침 조언을 얹은 지인이 바로 '보르도' 대학의 지질학과 교수 앙리 앙잘베르(Henri Enjalbert). 그는 붉은 빙하 하층토와 높은 고도에 위치하여 서늘한 기류의 영향을 받는 해당 지역이 포도 재배에 최적이라는 사실을 간파하고는 그에게 포도 재배와 와인 양조를 권했다. 특히 이 땅이 부르고뉴의 꼬뜨 도르(Cote d'Or)와 유사하다는 평가를 했다고. 그런데 왜 보르도 품종을 심었... 아마도 보르도쪽 교수님들 때문이겠지만ㅎㅎㅎ
이후 메독 지역으로부터 카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 품종을 중심으로 타나(Tannat), 말벡(Malbec) 등을 식재했고, 당대 최고의 양조 컨설턴트 에밀 뻬노(Emile Peynaud) 교수의 도움을 받아 1978년 첫 빈티지(레드)를 생산했다. 출시된 즉시 언론의 반응은 뜨거워서 '랑그독의 라피트 로칠드', '라뚜르 같은 맛' 같은 극찬이 쏟아졌다고. 현재는 메를로(Merlot), 카베르네 프랑(Cabernet Franc)은 물론 피노 누아(Pinot Noir), 바르베라(Barbera), 네비올로(Nebbiolo), 돌체토(Dolcetto) 등도 식재되어 일부 블렌딩된다. 1986년부터는 화이트 와인도 생산하는데 비오니에(Viognier), 쁘띠 망상(Petit Manseng), 샤르도네(Chardonnay), 슈냉 블랑(Chenin Blanc) 등을 중심으로 다양한 품종을 블렌딩한다. 블렌딩 비율은 레드, 화이트 모두 빈티지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듯. 아무래도 쥔장의 호기심과 실험정신이 대단한 듯 싶다. 2001년 부터는 에밀 뻬노 교수의 이름을 딴 뀌베 에밀 뻬노(Cuvee Emile Paynaud)도 출시했는데 좋은 빈티지에만 한정 수량 생산한다.
소유주인 에메 기베르 할아버지는 와인 다큐멘터리 영화 문도비노(Mundovino)에도 출연했다. 당시 남프랑스에 진출하려던 몬다비 등 거대 회사들을 대차게 깠지.
"와인은 죽었어"라는 명언을 남기심. (문도비노 스크린샷)
"요즘 보르도는 돈만 밝힌다니까" ㅋㅋㅋㅋㅋㅋ
... 그런데 포스팅을 위해 검색하다가 2016년 타계하신 사실을 알았다. 늦었지만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개인적으로 도마스 가삭을 처음 만난 건 10여년 전 쯤 ㅇ마트 할인코너에서였다. 매우 멀쩡해 보이는 그랑 뱅 화이트 하프 보틀이 19,900원에 한 박스 정도 풀려 있었더랬다. (와인 초보였던 당시로서는) 이름도 못 들어 본 하프 보틀이 2만원이면 상당히 비싼 축이었는데 레이블에서 풍기는 포스가 심상치 않아 검색을 해 봤더니... 엄청난 와인이었음. 혹시 몰라 한 병만 사서 마셔 봤는데 매우 멀쩡한 상태에 완전 취향 저격! 다음 날 달려갔더니 대여섯 병 정도 남아 있더라는. 아마도 나같은 호기심 충만한 인간들이 집어갔겠지. 상태가 안 좋아 보였던 두어 병을 제외하고 전부 담아왔었다. 이렇게 구매한 하프 보틀들을 2-3년에 걸쳐 다 까마신 후에 레귤러 보틀로 2005년 레드/ 2007년 화이트 한 병씩 사서 셀러링을 했었는데 몇 년 전에 동호회에서 홀랑 마셔 버렸다. 다시 만나고 싶은, 좀 더 숙성된 보틀을 맛보고 싶은 와인이다(특히 화이트!!). 지금은 어디서 수입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눈에 띄면 바로 구입해서 셀러링할 듯.
너무 삼천포로 빠졌다. 다시 물랭 드 가삭 길렘으로 돌아와서.
시라(Syrah) 40%에 그르나슈(Grenache), 까리냥(Carignan)을 30%씩 블렌딩. 100% 줄기를 제거한 포도를 모두 섞어서 양조한다. 섭씨 25-30도에서 10-12일 정도 침용하며 스테인레스 스틸 통에서 6-7개월 숙성한다. 오크를 사용하지 않는 프루티한 스타일의 전형적인 데일리 와인. 연간 생산량도 27만 병으로 상당히 많은 편. 와이너리에서는 3년 내 마실 것을 권장하고 있다.
권장하신 대로 1년 만에 마십니다ㅎㅎㅎ
Moulin de Gassac, Guilhem (Rouge) 2017 Pays d'Hérault / 물랭 드 가삭 길렘 (루즈) 2017
보라빛 감도는 생각보다 짙은 루비 컬러. 코를 대면 스모키한 뉘앙스가 살짝 스친 후 자두, 라즈베리, 들큰한 베리 사탕 아로마에 가벼운 스파이스와 커런트 힌트가 더해진다. 입에 넣으면 풍미는 들큰하지만 맛 자체는 비교적 드라이한 인상. 붉은 베리 풍미에 산미는 적으며 은은한 탄닌감이 느껴진다. 알코올은 13%. 과일의 선명성이 조금 아쉽긴 한데, 닭이나 오리, 삼겹살 등과 무난히 어울릴 것 같다. 여름도 다가왔으니 바베큐 와인으로도 좋겠군.
백레이블에도 적혀 있듯이 18-19도 정도로 약간 높은 온도에서 즐기는 것이 좋겠다. 셀러에서 막 꺼냈을 때 보다 온도가 살짝 올랐을 때가 더 맛있었음. 물론 한여름에 상온에서 바로 따 마시는 건 피하는 게 좋다. 냉장고에 20분 정도 넣어놨다가 드시라.
화이트는 어떨지 궁금해지네.
개인 척한 고냥이의 [술 저장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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