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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음주/우리술·한주

삼해소주 / 三亥燒酒

by 개인 척한 고냥이 2020. 1. 19.

 

 

삼해소주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은 김현주 전 전통주 갤러리 관장님이 쓴 <한잔 술, 한국의 맛>이라는 책을 통해서였다. 서울 종로에 위치한 양조장이라 언제 한 번 지나는 길에 들러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부근을 지나다가 기억이 났다. 조심스럽게 전화를 걸어 시음과 구입이 가능하냐고 문의했더니 (아마도 명인이 아니셨을까 싶은) 나이 지긋한 남성분이 흔쾌히 오라고 답변을 주셨다.

 

그 길로 양조장으로 출발.

 

 

 

삼해 양조장은 북촌 한옥마을과 가깝기 때문에 나들이도 할 겸 겸사겸사 들러도 좋겠다. 게다가 안국역 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샤퀴테리 전문 '소금집'과 술 중심 문화공간을 표방하는 '라 꾸쁘(La Coupe)'도 있으니 안주도 사고 목도 축일 겸 코스 메뉴로 들러도 좋을 것 같고. 

 

 

 

 

종로 YMCA에서 02번 마을버스를 타고 '안국선원, 삼거리' 정류장에서 내려 바로 위 골목을 따라 한 3-400m 정도 걸으면 작은 간판이 보인다. 시간 여유가 있다면 광화문-인사동 부근에서 걸어가도 될 만한 거리다.

 

 

 

 

처음에는 여기가 맞나 싶어서 쭈뼛쭈뼛 기웃기웃했는데 안에 있는 기물들과 명인의 사진으로 보아 맞는 것 같았다.

 

 

 

 

'삼해소주가' 간판보다는 북촌사진관 간판이 훨씬 크게 보이는데... 왜죠? 어쨌거나 건물 안에 붙은 명인님 사진이 이곳이 삼해소주가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8호 김택상 명인. 명인의 어머니 이동복 여사님이 대를 이어 양조해 온 삼해(소)주로 서울시 무형문화재가 되셨고, 2015년 명인님이 대를 이었다. 2016년에는 농림축산식품부 지정 전통식품명인 제69호로도 지정되었다.

 

 

 

 

삼해소주를 내리기 위해서는 먼저 밑술인 삼해주를 빚어야 한다. 삼해주는 그 이름의 유래대로 돼지날(해일, 亥日)에 빚는 술이다. 가을에 추수한 햅쌀로 다음 해 정월 해일에 밑술을 빚고, 12일 혹은 36일 뒤의 해일에 덧술하기를 세 번 반복해서 빚는다. 밑술부터 덧술까지 네 번에 걸쳐 빚는 사양주인 셈이다. 그만큼 쌀이 많이 사용되는 데다 빚는 데 108일이라는 오랜 시간이 걸리니 그만큼 품도 많이 들어간다. 추운 겨울 동안 천천히 익은 술을 가볍게 거르면 삼해탁주가 되는데, 알코올 도수가 약 17도 정도 된다고 한다. (삼해탁주도 판매하시는 것 같다.) 이 탁주를 맑게 거른 약주가 바로 삼해소주의 술덧이 된다.  

 

 

 

 

 

<한잔 술, 한국의 맛>에 따르면 삼해주는 조선시대 여러 문헌에도 등장할 정도로 인기 있는 술이었다. 마포나루에 삼해주를 빚는 술도가가 100여 개에 이르렀을 정도라고. 또한 돼지날에 술을 빚는 이유에 대해서 두 가지 가설을 제시하는데, 첫째는 12지 동물 중 돼지의 피가 가장 맑아 맑은술을 얻기 위한 바람을 담았다는 것과, 둘째는 돼지가 복과 재물의 상징이므로 한 해의 부유함을 기원하는 의미였을 거라는 추측이다. 김택상 명인은 이 두 가지 가설에 느린 동물인 돼지처럼 느리게 빚는 술, 그러니까 슬로 푸드의 철학까지 추가하셨다고 한다.

 

 

 

 

내부로 들어가니 뭔가 문주한 분위기였다. 설 연휴가 다가오니 그 준비로 바쁘신 것 같기도 하고. 그중에 눈에 들어왔던 건 구리로 만든 작은 증류기들이었다. 옆에서 설명해주시던 분이 '아라빅'이라고 표현하시는 것 같던데, 확인해 보니 아랍식 증류 장치의 통칭인 알렘빅(alembic)을 내가 잘못 들은 것 같다. 정확한 의미는 확인이 필요하다. 전통 소줏고리로 증류하면 수율이 너무 낮기 때문에 알렘빅을 사용하신다고.

 

참고로 삼해소주 양조장은 서울이 아닌 경기도에 있다. 삼해주는 서울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술이지만 공방이 위치한 북촌이 관광특구이기 때문에 양조장 허가가 나지 않는다고. 때문에 북촌에 있는 삼해소주가에서는 시음/체험 프로그램 및 판매만 진행하고 양조는 경기도의 양조장에서 한다.

 

 

 

https://samhaesoju.kr

 

samhaesoju.kr

삼해소주 사이트에서 시음 및  증류 체험까지 예약이 가능하다. 혼자서도 신청이 가능하지만 명인님이 직접 진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급적 인원을 모아서 하는 것이 좋다고. 혹은 따로 신청한 사람들을 모아서 진행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삼해소주가의 증류주들. 맨 좌측의 삼해소주를 기본으로 다양한 제품군들이 있다. 기본형인 삼해소주는 알코올 함량 45%.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으로 만들었다는 삼해국, 삼해포, 삼해고는 알코올 함량 50%다. 각각 국화(차)와 포도과즙, 상황버섯을 넣어 증류했는데 이런 재료의 풍미가 은은하게 녹아들어 색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단다.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전통을 기반으로 국내산 재료를 사용해 새로움을 창조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알코올 함량 45%인 삼해소주를 두세 번 더 증류해 풍미를 강화한 삼해귀주(三亥鬼酒)는 무려 알코올 함량이 71.2%다. 김현주 전 관장님은 '사람은 귀신이 되고, 귀신은 사람이 되는 술'이라고 소개했는데, 실제로 톡 쏘는 느낌과 알싸한 첫인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지만 목넘김은 부드럽고 편안해 금세 귀신이 업어가도 모를 정도의 노골노골한 기분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식도를 타고 내려가 위장에 도착한 귀주가 금새 따뜻한 기운을 뿜어내기 때문에 귀신에게 잡혀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일반 삼해소주 또한 누룩에서 유래한 복합적인 풍미가 복합적으로 드러나 그윽한 풍미가 인상 깊은 술이다. 단순하게 맑고 깔끔하게 떨어지는 술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무겁거나 부담스럽지 않은, 한 잔의 풍미를 즐기기에 딱 좋은 술이다. 그렇기에 진하고 기름진 안주에 곁들이는 반주보다는 얇게 썬 어란이나 한 알의 잣처럼 가벼운 안주와 함께 한 모금씩 머금으며 즐기기며 마시기를 권한다. 개인적으로도 식후에 소화제 겸 딱 한잔 마시는 용도가 딱 적당할 것 것 같다.

 

 

 

 

삼해소주는 상압증류식으로 증류하며 증류 후 물을 섞어 희석하지 않는다고 한다. 재료는 멥쌀, 찹쌀, 누룩, 정제수인데, 마지막 정제수는 양조 과정에서만 사용하는 듯. 많은 재료와 정성을 들여 추운 겨울에만 양조하는 술이기 때문에 그 가치가 높다.

 

 

 

 

설 연휴 때 아버지와 한 잔 기울일 용도로 한 병 구입했다. '귀주'를 샀으면 좋겠지만, 그랬다간 같이 사는 귀신(?!)에게 잡혀갈 가능성이 높으니까...

 

 

 

개인 척한 고냥이의 [알코올 저장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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