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홍로를 뭐랑 마셔야 맛있게 마실 수 있을지 생각해 봤습니다. 어젠 소&돼지 숯불구이, 그리고 각종 반찬들과 참 맛있게 마셨었죠. 반면 지나치게 매운 음식과는 잘 맞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았고요.
700ml짜리 큰 병이라 아직 반 병이나 남았는데 또 뭐랑 마셔 볼까... 고민하다 보니,
어울리는 잔을 찾아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술을 제대로 즐기는 데 꼭 필요한 것이 잔이거든요. 보통 전통주 중 증류주들은 소주잔이나 스트레이트 양주잔에 마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조금 갖춰서 마신다고 해도 사기/도기로 된 잔을 쓰는 경우가 많거든요. 모양과 크기가 소주잔과 유사합니다.
하지만 그런 작은 잔은 풍미가 직선적인 증류식 소주 등을 단숨에 털어 넣기에는 괜찮을지 몰라도, 감홍로 같은 맛과 향이 풍부한 술을 제대로 즐기기에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가지고 있는 잔을 꺼내 보았습니다. 주로 위스키를 마실 때 쓰던 잔들이지요.
개인적으로는 잔에 따라 느껴지는 향과 풍미가 상당히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입에 닿는 촉감도 다르고요. 물론 잔에 따라 느낌이 달라진다는 것을 부인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제 생각엔 물리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달라지는 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본격 시도해 보았습니다. 감홍로와 다양한 글라스의 마리아주!! 가지고 있는 잔 중 자주 사용하는 6종을 엄선했어요.
1번 타자는 위스키 테이스팅 글라스의 대명사, 글렌 캐런(GlenCairn) 글라스입니다. 대표적인 노징 글라스(nosing glass), 그러니까 위스키의 향을 피워 주는 글라스입니다. 놀라운 건 따르면서부터 향이 물씬 드러나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만약 감홍로를 처음 접하는 사람이라면 따를 때부터 피어나는 감홍로의 매력적인 향 때문에 술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질 수 있겠죠.
글렌캐런 글라스를 사용하니 달콤하게 톡 쏘는 계피향과 매실처럼 새콤한 과일 풍미가 더욱 화사하게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역시 향을 잘 피워주고, 밀도 있게 모아줘요. 게다가 뚜껑을 닫고 스월링을 한 후 향을 맡으면 이건 뭐... 아로마 폭탄이네요. 한참을 뚜껑을 덮었다 열었다 하면서 향을 즐겼습니다. 상당히 만족스럽네요.
두 번째는 리델 비늄 싱글 몰트 위스키(Riedel Vinum Single Malt Whisky) 글라스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글라스는 아일라(Islay) 지역 등 향이 명확하고 강렬한 위스키를 마실 때 자주 사용해요.
리델은 명실공히 세계 제1의 와인 글라스 메이커로, 그들의 소믈리에 부르고뉴(Sommelier Bourgogne) 글라스는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리델 비늄 싱글 몰트 위스키 글라스에 감홍로를 마시니 드라이한 인상에 구수한 누룩향이 먼저 드러납니다. 상대적으로 약재 뉘앙스는 약해요. 반면 입에 넣으면 상큼함이 어느 정도 살아나며 누룩 풍미와 함께 피니시에 가벼운 쌉쌀함이 남습니다. 사용한 잔 중 '술 본연의 강력한 인상'이 직선적으로 가장 잘 드러났네요.
세 번째는 리델의 자회사이자 또다른 유명 글라스 메이커 슈피겔라우(Spiegelau)의 최상위 레벨인 빌스베르거 컬렉션을 머신 메이드로 대중화한 빌스베르거 애니버서리 위스키(Willsberger Anniversary Whisky) 글라스입니다. 보울 하단이 대단히 넓고 직경 또한 길어서 향을 풍성하게 피워내는 잔입니다.
실제로 달콤 새콤 쌉싸름한, 오미자가 연상되는 과일향과 부드러운 정향 허브, 약재향이 조화롭게 피어납니다. 누룩향 또한 은은하게 드러나고요. 스월링을 하면 할수록 복합적인 향들이 화사하게 피어납니다. 입에 머금을 때 풍미의 밸런스 또한 좋아요. 감홍로의 풍성한 향을 만끽하기에는 최적의 잔이 아닐까 싶습니다. 향을 우아하게 피워주니까요.
다른 안주 없이 이 한 잔 만으로 충분할 것 같네요.
이번엔 키다리 잔으로 가 봅니다. 감홍로 병보다도 키가 크네요. 리델 베리타스 스피릿(Riedel Veritas Spirits) 글라스입니다.
베리타스 스피릿 글라스에 마시니 계피와 정향 같은 스윗 스파이스의 매력이 뿜뿜입니다. 달콤한 과일 향기와 구수한 곡물 풍미가 뒤를 받치며 절제된 누룩 힌트가 가볍게 드러납니다. 역시 좋네요. 특히 전반적인 풍미의 밸런스가 적당하게 조화를 이룹니다. 이런 점은 글렌캐런 글라스도 유사했어요.
또 다른 키다리 잔, 리델 퍼포먼스 스피릿(Riedel Performance Spirits) 글라스입니다. 베리타스 글라스보다 보울 아랫부분이 좀 더 볼록하고, 울룩불룩 주름이 잡혀 있어 공기와의 접촉면이 더 크지요.
리델 퍼포먼스 스피릿 글라스에서는 새콤한 작은 베리 같은 향기가 먼저 드러납니다. 이후 화사한 감초, 정향 등의 약재 향이 상쾌하고 신선한 인상을 남기고요. 입에서는 매콤 달콤한 계피와 생강 풍미가 수정과를 연상시킵니다. 전반적으로 발랄한 매력을 살려 주는 느낌이네요. 이 또한 마음에 듭니다.
마지막은 땅꼬마 잔으로 돌아왔습니다. 리델 비늄 스피릿(Riedel Vinum Spirits) 글라스입니다. 코냑/아르마냑, 위스키, 데킬라, 보드카, 그라빠 등 다양한 증류주용이라는데 개인적으로는 바이주 혹은 증류식 소주를 마실 째 주로 사용합니다.
요 잔에서도 누룩향과 곡물향이 상대적으로 도드라집니다. 약재향 등 다른 향들은 은은하게 감도는 정도. 덕분에 깔끔하고 개운한 맛이 느껴지네요. 터프하게 툭 툭 털어 넣으려면 이 잔을 사용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감홍로처럼 좋은 술을 그렇게 마시기엔 너무 아깝지 않나 싶네요.
전체적으로 총평을 해 보자면, 글렌케런이나 리델 베리타스, 퍼포먼스 같은 튤립 스타일의 잔이나 슈피겔라우 빌스베르거 같이 보울이 커다란 잔이 감홍로에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감홍로에 사용된 약재 향과 발효 과정에서 생성된 과일향을 매력적으로 끌어내야 감홍로의 매력을 확실히 느낄 수 있으니까요.
만약 감홍로의 패키지가 좀 더 모던하고 캐주얼하게 바뀐다면, 함께 들어가는 글라스 또한 글렌케런 같은 형태의 노징 글라스를 써 보시는 건 어떨까 싶네요. 감홍로의 아름답고 우아한 향을 더욱 잘 느낄 수 있도록요.
감홍로는 아래 사이트에서 구입할 수 있습니다. 전통주이므로 온라인/택배 구매가 가능해요.
- 감홍로 홈페이지 : www.gamhongro43.modoo.at/
- 우리술 갤러리(감홍로 판매) : www.smartstore.naver.com/woorisulgallery/products/4765429571
개인 척한 고냥이의 [알코올 저장고]
사족.
갑자기 냉장고 안에 있던 아이스크림이 떠올라서,
꺼내 보았습니다. 하겐다즈의 피넛 버터 크런치네요. 감홍로를 바닐라, 혹은 호두 아이스크림에 끼얹으면 맛있다던데, 요 녀석은 어떨까요?
감홍로를 30ml 가 조금 안 되게 준비해서,
수저로 억지로 긁어 모은 아이스크림에,
냅다 끼얹습니다ㅎㅎㅎㅎ
두근두근... 과연 맛이 어떨지 걱정(?)이네요;;;
비주얼은 폭망ㅠㅠ ...이지만, 어라,, 이 녀석 은근히 맛있습니다. 버번 초콜릿과 맛은 다르지만 그 경향성은 같다고 해야 할까요. 피넛 버터의 맛과 어우러지니 뭔가 땅콩 캐러멜 같은 느낌도 들고요. 기본적으로 계피와 정향 같은 스파이스들이 땅콩 맛 아이스크림을 더욱 고급지게 만들어 줍니다. 어른의 아이스크림이란 이런 거군요.
위스키 & 코냑 관련 모 카페에서는 위스키와 카라멜 페어링도 하던데, 감홍로도 충분히 다양한 디저트들과 페어링을 시도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미 시도하시는 것처럼 칵테일 베이스로도 가능성이 높아 보이고요.
남은 감홍로도 다양한 방법으로 마셔봐야겠습니다. 볼 수록 매력 있고 흥미로운 술이네요.
'일상의 음주 > 우리술·한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경 오미나라 재방문기 (오미로제 연, 고운달) (0) | 2020.07.11 |
---|---|
제주 오메기 맑은술 (0) | 2020.07.08 |
감홍로 푸드 페어링 with 숯불구이 (0) | 2020.05.10 |
감홍로 언박싱(unboxing) (0) | 2020.05.09 |
삼해소주 / 三亥燒酒 (0) | 2020.01.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