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반 고흐가 사랑한 술, 압생트(Absinthe). 자신의 귀를 자른 원인이 압생트로 인한 환각이라는 얘기가 있다. 그의 독특한 색감 또한 압생트에 의한 시력 손상 때문일 거라는 설도 있고.
고흐 외에도 고갱, 피카소, 마티스, 툴루즈 로틀렉 등 많은 화가들이 애용한 술로 유명하다. 이외에도 에드가 알렌 포, 랭보 & 보들레르 등 다양한 예술가들이 압생트를 즐겨 마셨다고. 가히 벨 에포크(Belle Epoque) 시대를 대표하는 술.
마릴린 맨슨(Marilyn Manson) 형님 또한 압생트의 팬으로, 자기 이름을 딴 Mansinthe라는 제품을 출시하기도 했다. 그런데 레이블이 MB 닮았...
빈센트 반 고흐에 대한 맨슨다운 오마주도...
예술가들이 이렇게 압생트를 사랑한 데는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일단 값이 쌌기 때문이다. 가난한 예술가들은 항상 돈이 부족했을 테니. 게다가 그 명확한 풍미와 높은 도수 또한 선호 이유였을 것이다. 압생트는 기본적으로 증류한 알코올에 향쑥(wormwood), 아니스(annis), 회향(fennel) 등 약초계 허브를 침출해 만든다. 압생트라는 이름 자체가 향쑥의 라틴어인 압신티움(Artemisia Absinthium)에서 유래한 것. 보통 알코올 함량이 55%~75%로 도수가 높고 약초 풍미 또한 진하다.
그런데 한동안 유럽 등 전 세계에서 압생트 판매가 금지된 적이 있었다. 주원료인 향쑥에 포함된 투존(Thujone)이라는 성분이 신경에 영향을 주어 정신 착란을 일으키고 환각을 보게 되며, 장기 음용하면 시신경이 파괴될 수 있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기 때문. 또한 알코올 남용과 중독에 대한 책임 또한 인기 주류였던 압생트가 뒤집어쓴 탓도 있다. 하지만 이는 압생트에 인기를 빼앗긴 와인과 다른 주류 생산자들의 로비 때문이었다고 한다. 실제 압생트에 포함된 투존은 리터 당 고작 5mg 정도에 불과해 환각을 일으키고 건강에 문제를 주기에는 매우 적은 양이기 때문이다. 현재 유럽에서는 압생트 판매 금지는 유명무실해졌고, 판매 또한 이루어지고 있다.
참고로 압생트 판매가 금지되었을 때 투존 성분을 빼고 유사한 풍미를 내는 술로 각광받았던 것이 바로 페르노(Pernod)다. 이런 술을 '가짜(압생트)'라는 의미로 파스티스(pastiche)라고 부르는데, 만화 <바텐더>에서도 소개된 적이 있다. 페르노 외에 리카(Ricard)도 유명하다. 그리고 이 두 회사가 합쳐진 것이 현재의 거대 주류기업 페르노 리카(Pernod Richard).
서론이 길었다.
지금 소개하는 압생트 55(Absente 55)는 1989년 판매 금지 이후 최초로 투존(10mg)을 함유하고 출시된 압생트라고 한다. 향쑥과 쑥, 그린 아니스, 박하 등을 재료로 달콤하고 스파이시한 맛을 낸다. 레이블 또한 향쑥 그림으로 장식돼 있다. 원래 이 제품은 프랑스어로 'absent'라는 의미의 이름이 말해 주듯 유사 압생트에서 출발한 것 같은데, 현재는 과거 압생트에 쓰이던 향쑥, 아니스 등을 첨가해 제법 '압생트 답게' 만들고 있는 것 같다.
압생트는 상당히 독하기 때문에 보통 설탕과 물을 더해서 마신다. Nine Inch Nails의 Perfect Drug 뮤직 비디오에도 이런 장면이 나오는데, 압생트를 따른 잔 위에 전용 스푼을 놓고 각설탕을 올린 후 물을 떨어뜨려 놓여 먹는다.
이런 방식을 압생티아나(Absinthiana)라고 한다. 물을 떨어뜨리면 원래 투명한 액체인 압생트가 우윳빛으로 변하는데, 이는 (주로 아니스의 풍미를 이루는) 유질 성분이 찬물을 만나 백탁 현상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참고로 스푼 위의 각설탕에 압생트를 적셔서 불을 붙여 녹이는 것이 정석인 것처럼 알려져 있는데, 이는 사실 압생트 판매 금지 시절 체코에서 생산하던 유사 압생트, 그러니까 보헤미안 압생트(Bohemian-style Absinth) 판매업자들이 만든 방법이라고 한다. 유사 압생트에는 아니스가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물을 넣어도 백탁 현상이 발생하지 않았고, 이를 상쇄하기 위해 있어빌리티가 확실한 마케팅적 방법을 고안해 낸 것. 나도 사실 스푼 사서 불 붙여볼까 살짝 고민했었는데... 안 사길 잘했다;;;
조금 따라서 맛을 보았다. 그런데 생각보다 익숙한, 게다가 묵직하거나 빡세지 않고 향긋하게 떠오르는 향이다. 이게 왜 익숙한가 생각해 봤더니, 집에서 수육 삶을 때 넣던 팔각(Star Anise) 향기다! 훠궈 먹으러 가면 많이 나는 (고기와 매콤한 향기를 뺀) 향이랑도 비슷하고. 거기에 화한 허브 향이 더해져 컬러에서 연상되는 느낌과 유사한 아로마가 완성된다. 입에 넣으면 향보다 훨씬 밀도 높은 풍미가 드러나며, 혀에 닿는 순간 짜릿하게 높은 도수가 느껴지지만 단맛이 균형을 잡아줘 생각보다 부담스럽지는 않다. 목 넘김 후에는 입안이 마르는 듯한 드라이 뉘앙스가 길게 남는다.
물을 조금 타 보았다. 뭔가 좀 섞이는 느낌은 있는데 백탁 현상이 일어나는 것 같지는 않다. 뭐지? 싶어서 물을 더 넣어봤더니,
요렇게 레몬 컬러의 탁한 액체가 되었다. 향에서도 약간 애플 민트나 레몬 같은 시트러스 계열의 향이 난다. 입에서의 단맛은 그대로이고 알코올 뉘앙스는 줄어들어서 마시기 편한 상태가 되었다. 백탁 현상이 일어나려면 물을 몇 방울 떨어뜨리는 정도가 아니라 최소 압생트와 동일한 양을 넣어야 한다. 일반적으로는 3-5배 정도 희석해 마신다고 한다. 하긴, 각설탕을 올려놓고 녹을 정도로 물을 흘려야 하니까. 굳이 설탕까지는 넣지 않아도 될 것 같지만, 피니시의 드라이한 뉘앙스를 완화하려면 설탕을 넣는 게 낫다. 실제로 설탕을 추가했더니 드라이한 인상이 상당히 완화되었다. 역시, 클래식한 레시피에는 다 이유가 있는 거다.
그런데 왠지 몇 모금 마시지도 않았는데 눈이 약간 시큰거리는 느낌. 기분 탓이겠지... 설마 시신경 손상? -_-;;
생산자인 디스틸러리 & 도멘 드 프로방스(Distilleries & Domaines de Provence) 홈페이지에서 압생트를 활용한 다양한 칵테일 레시피들을 소개하고 있다. 사실 나는 사제락(Sazerac) 칵테일 린스 용으로 구매한 거라 이걸 언제 다 쓸까 걱정했는데, 그래도 이런저런 레시피가 많아서 다행이다. 하지만 해볼 만한 게 압생트 토닉 정도 밖에는 없어 보이는 건 함정;;;
그런데 홈페이지에 소개된 레이블(좌)과 내가 산 보틀의 레이블(우)이 살짝 다르다. 홈페이지 레이블 상단에는 Absinthe라고 쓰여있는데, 내 보틀엔 Plant Liqueur라는 표현이 대신 들어가 있다. 뇌피셜이지만 아마 아직 압생트 생산 및 판매가 금지된 지역에 수출하기 위한 꼼수가 아닐까. (우리나라는 판매 금지가 풀린 것으로 알고 있지만...) '플랜트 리큐르(Plant Liqueur)'란 허브나 나무뿌리 등 식물을 원료로 한 리큐르를 말하는데, 과거 압생트 판매 금지 시절에 유사 압생트를 이런 식으로 표현했던 것 같다.
백 레이블에 표시된 원재료는 주정, 물, 설탕, 천연향(물쑥, 쓴쑥, 쑥, 스타아니스, 페퍼민트, 레몬밤, 아니스), 식용색소청색 제1호, 식용색소황색 제4호. 와인 수입사인 에프엘코리아에서 수입한다.
낱병보다는 전용 스푼에 전용잔까지 포함된 세트가 자주 보인다. 세트가 기준 와인앤모어에서 7.6만 원, CU 스마트 오더에서 8만 원. 남대문에서는 7만 원 부르던데, 나는 스푼과 잔은 필요 없어서 낱병만 6만 원에 구매.
개인 척한 고냥이의 [ 알코올 저장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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