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토 필립 르 하르디 부르고뉴 피노 누아 비에이으 비뉴(Chateau Philippe-Le-Hardi Bourgogne Pinot Noir Vieilles Vignes). 기본급 부르고뉴 피노 누아지만 상당히 의미 있는 와인이다.
레이블의 문양이 마치 오스피스 드 본(Hospice de Beaune)의 타일 지붕과 유사한데, 사실 요 건물의 지붕이다. 건물의 이름은 샤토 드 상뜨네(Chateau de Santenay). 이름처럼 꼬뜨 도르(Cote d'Or) 남단 상트네(Santenay) 마을에 위치하고 있는데, 부르고뉴에서 가장 큰 도멘 중 하나로 꼬뜨 도르와 꼬뜨 샬로네즈(Cote Chalonnaise) 전역에 95 ha의 포도밭을 보유하고 있다. 그중엔 3개의 단독 소유 포도밭(Monopole)과 12개의 프르미에 크뤼(1er Cur), 1개의 그랑 크뤼(Grand Cru)도 포함돼 있다고.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와인의 이름이다. 필리프 르 하르디(Philippe-Le-Hardi), 한국식으로 쓰면 용담공(勇膽公) 필립이 되는데, 그가 바로 1395년 부르고뉴에서 많이 재배하던 가메(Gamay) 품종을 퇴출시키고 피노 누아 품종만을 사용하도록 칙령을 내린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샤토 드 상트네는 바로 그 용담공이 소유했던 성이라는 인연이 있다.
피노 누아의 중흥에 절대적인 계기를 마련한 인물의 이름을 내건 피노 누아. 지역(regional) 등급이긴 하지만 올드 바인(vieilles vignes)로 만든 와인이라니 품질이 궁금할 수밖에 없다.
Chateau Philippe-Le-Hardi Bourgogne Pinot Noir Vieilles Vignes 2018
샤토 필립 르 하디 부르고뉴 피노 누아 비에이으 비뉴 2018
진한 루비 컬러에 붉은 꽃 향기와 가볍게 톡 쏘는 스파이스, 자두와 진한 레드 베리의 과일 풍미가 드러난다. 입에 넣으면 뭔가 꽉 닫힌 느낌. 마을 단위 와인도 아니고 지역 단위 와인이 이러니 뭔가 뭉툭한 와인인가 싶은 느낌이다. 뭔가 하늘하늘 피어나는 느낌이 아니고 그냥 답답한 느낌이랄까. 신맛이 드러나 새콤한 맛인 것도 아니고... 그래도 슈바인학센과 곁들이니 그럭저럭 마실만 해서 1/3쯤 마시고 막아두었다.
그리고 이튿날, 훈제 오리 구이와 함께 한 잔 맛을 봤는데, 어라, 예쁜 딸기와 라즈베리 풍미가 적절한 신맛과 함께 영롱하게 드러나는 것 같다. 오호, 맛있는걸... 하며 두 잔을 연거푸 마신 후 더 마시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점심이라 간신히 참고 막아두었다. 다시 이틀 후, 이번엔 한우 수육과 함께 마셨는데... 어라, 이건 완전히 피어나서 화사한 꽃향기와 가벼운 허브 힌트, 체리, 딸기, 앵두 등 다양한 붉은 베리 풍미가 복합적으로 드러난다. 5일 동안 3번에 걸쳐 마시고 있는데 과실미 뿜뿜에다 산화된 뉘앙스도 거의 없고 시음 적기의 와인을 막 연 듯한 느낌이라니... 놀랍다. 농가 뉘앙스 같은 건 거의 없고 감초나 약재향도 미미하다. 꽃과 허브, 과일, 그리고 미네랄리티만 예쁘게 드러난다.
이 정도 피노 누아면 거의 꼬뜨 도르의 수준급 생산자의 것이 부럽지 않을 듯. 지역급이지만 살짝 셀러링이 필요해 보인다. 굳이 바로 마시려면 에어링해서 살살 달래 가며 마시는 게 좋을 것 같고. 한 병 더 사야하나 고민이...
안주들이 워낙 좋기도 했다. 아침목장의 슈바인학센을 오븐에 구워서,
예쁘게 해체한 후,
러프하게 썰어서,
발뮤다에 구운 바게트와 함께 마셨으니...
바게트에 얹어서 오픈 샌드위치처럼 먹어도 핵꿀맛.
연잎에 싼 오리 훈제 구이랑도 베스트 페어링. 발사진이라 매력 반감ㅠㅠ
아침목장의 화식한우 1+등급 양지와 사태로 만든 수육.
대충 삶았는데도 재료가 좋으니 웬만한 수육집보다 맛있는 것 같다.
내 사랑 아롱♥
가메 품종을 좋아하는지라 용담공 미워했는데 이 와인 때문에 용서해 주기로 했다. 죄를 사하노라~
개인 척한 고냥이의 [ 알코올 저장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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