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어이없게도, 조주기능사 실기 시험을 탈락했습니다. 오래전 불의의 사고(?)로 운전면허 코스 시험 떨어졌을 때 이상의 충격이네요ㅜㅜ 레시피는 확실히 다 외웠고, 고득점은 아니더라도 무난히 합격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필기가 너무 쉬워서 실기도 너무 쉽게 생각했나ㅠㅠ 현타의 시간이 지나고 나니 후회가 엄청 밀려옵니다.
일단 탈락자로써 혹시나 이 글을 보실 다른 조주기능사 준비생 분들께 드릴 팁을 요약하면 아주 간단합니다.
7분의 시간은 길지 않지만, 레시피를 확실히 외웠다면 절대로 부족하지 않을 시간입니다. 가장 복잡한 칵테일만 세 개 나온다고 해도 충분한 시간이에요. 당황만 하지 않는다면 말이죠. 그러니 침착하게 시험을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당황하지 않으려면 사전 준비가 잘 되어 있어야 하고, 현장에서 기물/재료 파악을 효과적으로 하는 게 중요합니다.
저의 탈락 사유는 시간 미달입니다. 그런데 글라스도 하나 잘못 썼고, 자잘한 실수도 상당히 많아서 완작을 했더라도 붙었을지 잘 모르겠어요. 분명히 레시피는 제대로 다 외웠습니다. 그런데 당황해서 허둥대다 보니 아는 것도 빼먹고 틀리게 되더라고요. 시험 문제를 보는 순간 시간이 빠듯하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급해진 게 문제였습니다. 어차피 차근차근 하면 다 할 수 있는 건데...ㅠㅠ
시작하기 전에 2분의 기물/재료 위치 확인 시간을 줍니다. 그 땐 슥- 둘러보며 뭐가 어디 있는지 제법 확인했다고 생각했는데, 시험 문제를 보는 순간 그대로 리셋되더군요. 대충 하나씩 확인하면 안 됩니다. 아직 시험문제가 뭐가 나올지 모르는 상태이기 때문에, 어떤 게 나와도 필요한 재료를 찾을 수 있도록 큰 틀에서 익혀 둬야 해요. 주조 기구, 기주, 리큐르, 전통주, 부재료, 글라스, 가니시 등 종류 별로 위치를 확인하고 시간이 남으면 리큐르를 중심으로 특별히 낯선 개별 재료들을 별도로 더 확인하는 게 좋아요. 물품은 조리대 앞쪽에 기물들과 왼쪽 오른쪽에 3단 장, 그리고 뒤편 싱크대에 한 줄 있는데 그냥 쓱 볼 때는 대충 알 것 같지만 막상 찾으려면 잘 기억이 안 납니다. 게다가 같은 브랜드(예를 들어 리큐르는 볼스, 주스는 스카시 등)가 쭉 늘어서 있기 때문에 더 눈에 안 들어와요.
지금 생각하면 가장 큰 문제는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다는 생각에 긴장한 거였어요. 시험 문제로 그래스호퍼, 올드 패션드, 피나 콜라다가 나왔는데 하필 안 만들어 본 칵테일이 두 개(그래스호퍼, 피나 콜라다)나 포함돼 있었거든요. (전통주 칵테일, 블렌더 사용 칵테일 빼고 20개 이상은 야매로라도 만들어 보고 갔습니다.) 그래도 올드 패션드는 좋아하는 칵테일이라 손에 익었고, 나머지도 레시피는 아니까 문제는 없을 거라 생각했어요. (여기서부터 변명) 그런데 올드 패션드가 빌드 중에서는 손이 많이 가는 편(각설탕 녹이기 & 가니시...)인 데다 집에서 먹을 땐 각설탕이 아닌 가루 설탕을 쓰는지라 부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다고 생각하니 부담이 되더라고요. 피나 콜라다는 블렌더를 사용하는 칵테일인데 블렌더 쓰는 방법도 손에 익지 않았으니 확인하며 하려면 서둘러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이때부터 확실히 말린 것 같습니다.
시험 문제가 제시되면 거의 바로 시험이 시작됩니다. (경우에 따라 시험관이 빨리 문제를 오픈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기물을 체크하면서 꼭 칠판을 확인해 보세요.) 서둘러야 한다는 생각이 드니 기물과 재료가 눈에 하나도 안 들어옵니다. 아무 생각 없이 1번인 그래스호퍼를 먼저 만들기로 결심하고 심지어 잔을 꺼내는 데도 시간이 한참 걸렸는데 그래스호퍼가 소서를 사용하는 유일한 칵테일인걸 유의하며 외웠는데도 칵테일 글라스를 꺼냈어요;;; 시간만 허비하고 틀린 답 선택...ㅠㅠ 지금 생각하면 어이가 없지만 셰이커랑 지거 꺼내는 데도 시간이 걸렸고ㅠㅠ 그리고 민트 그린 찾고 화이트 카카오 찾는데 안 보여서 허둥대다 보니 2분 40초 정도가 그냥 지나가 버렸습니다. 우유 찾아 넣고 셰이킹 하고 잔에 따랐는데 이미 4분 지났더라고요. 3분에 올드 패션드랑 피나 콜라다를 다 만들 수 있을까 생각하니 더 똥출이 탔...
사실 앞에 재료와 도구가 다 세팅이 되어 있다면 만들 수도 있는 시간이겠죠. 내가 떨어진 건 시험장 잘못-_-;;;; 하지만 그래스호퍼 만들 때 허둥댔는데 올드 패션드 만들 때는 안 허둥댔을까요;;; 일단 앙고스투라 비터스 찾느라 또 한참 걸렸어요. 이게 원래 병이 아니라 유리병에 들어 있고 스티커가 붙어 있더라고요-_-;;; 여러 캔 중에 클럽 소다 찾는데 또 시간 걸리고, 대충 스터 하고 가니시 자르고 체리 꺼내고 픽으로 꿰고 하는데 왜 이리 잘 안 들어가는지 시간이 엄청 흘러갑니다. 그러고 나니 1분도 안 남았더라고요. 뒤돌아서 블렌더 가져오고 럼 넣고 피나 콜라다 믹스 찾는데 또 눈에 안 들어오고... 파인애플 주스 찾아 넣고 블렌더를 돌리는데, 세상에... 급하다 보니 얼음도 안 넣고 돌리고 있더라고요. 그 순간 알았습니다... 글렀구나ㅠㅠ 그리고 뒤로 돌았는데 타임 오버였어요;;; 갑자기 만화 <바텐더>에서 주인공이 자기 제자가 첫 칵테일 만들 때 옆에서 재료를 착착 준비해 주던 장면이 생각나네요. 빠른 재료 준비가 칵테일 조주의 80% 이상입니다.
변명을 요약하면, 앞에 내가 만들 기물과 재료들만 쫙 모여 있었다면 여유롭게 만들고 심지어 시간이 남았을 겁니다. 하지만 기물과 재료를 찾는데 한참 걸리고, 한 번 눈에 안 띄기 시작하면 머리가 하얘져요. 그럼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갑니다. 운이 좋아 빨리 물건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면 그대로 실격할 가능성이 높죠.
그래서 조주기능사 시험을 앞두고 있다면 아래 내용을 꼭 유념해야 합니다. (다음에 시험 볼 나놈을 위한 정리ㅠㅠ)
1. 레시피는 툭 쳐도 나올 정도로 확실하게 외워 둡니다. 외워 둔 레시피도 눈앞에 재료가 안 보이면 더 헷갈리기 시작합니다. 혼란이 혼란을 불러오는 거죠. 특히 독특한 잔이나 가니시를 쓰는 칵테일 등은 확실히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레시피를 보면 주조법 별로 재료나 비율의 경향성이 있으니 참고해서 기억하면 당황한 상태에서도 쉽게 기억을 되살릴 수 있을 겁니다. (예를 들어 셰이크 & 빌드 기법의 경우 기주는 1+1/2oz, 레몬주스 1/2oz, 설탕 1티스푼)
2. 입실 후 2분 동안 기물과 재료를 확인할 때 카테고리 별로 대략적인 위치를 먼저 기억합니다. 기물/재료 하나하나의 위치는 기억하려고 해도 잘 기억이 안 돼요. 휘경동 시험장의 경우 조리대 앞 오른쪽에 지거, 바 스푼, 믹싱 글라스, 셰이커, 집게 등 주조를 위한 기물이 있습니다. 기물 근처에 도마와 칼, 얼음, 가니시 재료들이 있고요. 좌/우에는 3단 정도의 장이 있는데 왼쪽에는 주스, 시럽, 우유, 믹스 등의 부재료가 있고, 그 아래쪽에 각종 글라스들이 있습니다. 시작하면 잔과 주조 기물부터 꺼내게 되므로 첫 과제 시 바로 꺼낼 수 있을 정도로 기억해 두는 게 좋습니다. 오른쪽의 하단에는 기주들이 있고 그 위로는 주로 볼스 사를 중심으로 다양한 리큐르들이 있습니다. 카테고리 별 위치를 파악하고 나면 개별 재료는 리큐르를 가장 먼저 확인합니다. 그러면서 그 리큐르는 어떤 레시피에 사용하는지 최대한 생각해 보세요. 뒤편 싱크대 근처에는 화이트 와인과 전통주, 그리고 그랑 마니에르, 쿠엥트로 등 전통적인 리큐르들이 있습니다. 블렌더도 뒤에 있고요. 시험 전엔 전통주 칵테일이 익숙하지 않아서 헷갈리지 않을까 했는데, 외려 전통주가 나오면 땡큐일 것 같습니다. 기주 구분하기가 아주 쉬우니까요. 시험 볼 때 리큐르의 경우 같은 브랜드들이 쫙 늘어서 있기 때문에 의외로 찾기가 힘듭니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면 당황하지 말고 차례로 하나하나 보는 게 빨리 찾는 방법입니다. 허둥대며 이것저것 들었다 놨다 하다 보면 시간만 더 많이 빼앗겨요.
3. 주조의 기본이 되는 순서에 맞게 연습을 하거나 연습이 불가하다면 동영상을 보며 이미지 트레이닝을 최대한 많이 해야 합니다. 잔에 얼음을 채우고 치우고 조주 기구에 얼음을 넣고 주조 후 잔의 얼음을 버리고... 하는 게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막상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는 착착 진행하기 쉽지 않습니다. 차례로 정돈하며 진행할 수 있도록 이미지를 만들어야 해요. 동영상은 유튜브에서 검색하면 아주 많이 나옵니다. 이런 준비가 안 돼 있으면 허둥대기 쉽고, 정리 없이이것저것 꺼내놓다 보면 더 정신이 없어져요. 조리대가 매우 협소하기 때문에 실수할 가능성도 높아집니다. 실제로 제 옆 수험자는 조주 중이던 술을 엎어버리는 실수를 했어요. 문제 중 어떤 기법의 칵테일을 먼저 만들지 미리 정해 두는 게 좋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꺼낼 조주 기물과 잔의 범위가 어느 정도 정해지니까요.
4. 자신 있는 것부터 먼저 만들면서 평정심을 찾습니다. 시간도 최대한 벌고요. 첫 과제에서 시간을 많이 빼앗기면 더 당황하게 됩니다. 첫 과제를 2분 안에만 끝내도 어느 정도 여유를 가지고 나머지를 진행할 수 있습니다. 올드 패션드 먼저 할 걸ㅠㅠ 셰이크나 빌드 기법 중 하나를 먼저 만드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요. 그리고 맛있게, 예쁘게 만드는 게 목적이 아니고 제대로 레시피에 맞게 칵테일을 완성하는 게 목적이라는 걸 명심해야 합니다. 일부 실수를 하고 모양이 안 예쁘더라도 일단 기억하는 레시피대로 남은 과정을 속도감 있게 끝마쳐야 합니다.
다음 실기 시험 접수는 5월 10-13일이군요. 다시 접수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 넘나 슬프지만, 두 번 실수하진 않을 겁니다. 이 굴욕, 반드시 기억해 두마...ㅠㅠ
개인 척한 고냥이의 [ 알코올 저장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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