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맛봤을 때만 해도 그 진가를 정확히 파악하진 못했었는데, 세미나를 들으며 두 번째 맛을 보니 그 가치를 어느 정도는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더 피크 2016 같은 건 셀러 구석에 처박아놓고 잊어버려야 할 와인인데... 특히 와인메이커 크리스 카펜터는 로코야(Lokoya)도 그렇고 우격다짐 스타일의 와인이 아닌 섬세하고 정교하며 다층적으로 풍미를 드러내는 균형과 구조가 좋은 와인을 만든다는. 라 호타(La Jota), 마운틴 브레이브(Mt. Brave) 같이 좀 더 접근성이 좋은(=저렴한) 그의 와인들도 맛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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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호주의 위대한 그랑 크뤼, 히킨보탐(Hickinbotham)
"클라렌던 빈야드는 주위 환경보다 높게 솟아 있으며, 거대한 초록빛 피라미드처럼 보인다.
경사면과 정상은 무성한 덩굴로 뒤덮여 있고, 그 울창하고 푸른 잎사귀는 늘 변함이 없다."
- 에베네저 워드 (1862, 호주의 정치가이자 저널리스트)
호주에는 프랑스나 독일처럼 공식적인 그랑 크뤼(Grand Cru)는 없다. 하지만 누구나 인정하는 그랑 크뤼급 포도밭은 존재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맥라렌 베일(McLaren Vale)에 위치한 히킨보탐 클라렌던 빈야드(Hickinbotham Clarendon Vineyard)다. 랭턴 등급 분류(Langton's Classification)를 창시한 마스터 오브 와인 앤드류 카이야르(AndrewCaillard MW)가 호주의 그랑 크뤼라고 평한 곳이기도 하다. 이 위대한 포도밭에서 세계적인 와인메이커 2인이 함께 탄생시킨 히킨보탐 와인 4종을 소개하는 웨비나가 지난 11월 19일 WSA와인아카데미에서 열렸다. 작년 11월 히킨보탐이 국내에 출시된 이래 처음 진행되는 공식행사다.
웨비나의 진행자는 와인 업계 13년 경력의 소믈리에이자 히킨보탐을 보유한 글로벌 와인 그룹 잭슨 패밀리 와인즈(Jackson Family Wines)의 홍보대사 안드레스 아라곤(Andres Aragon) 씨. 그를 통해 히킨보탐 클라렌던 빈야드의 역사와 테루아, 포도 재배 방식 및 양조 철학을 확인하고 히킨보탐의 와인들을 자세한 설명과 함께 테이스팅 할 수 있었다.
히킨보탐의 위대한 테루아
히킨보탐 클라렌던 빈야드가 위치한 맥라렌 베일은 호주의 대표적인 와인 산지로, 19세기 중반부터 포도밭이 식재된 곳이다. 원래 맥라렌 베일은 바다와 인접해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를 보여 포도뿐만 아니라 다양한 농작물이 잘 자라는 곳이었다. 특히 맥라렌 베일의 북서쪽 끝에 위치한 히킨보탐 클라렌던 빈야드는 맥라렌 베일 전체에서도 가장 빼어난 입지조건을 자랑한다. 북쪽 언덕 높은 고도의 남향 경사면에 자리 잡고 있는데, 심한 곳은 경사각이 40도를 넘는다. 이런 지형 덕분에 기후는 전반적으로 서늘한데 일조량은 충분해 생리적으로 완숙되면서도 신선한 신맛이 살아있는 포도를 얻을 수 있다. 돌이 많이 섞인 화산토 중심의 토양은 와인에 영롱한 미네랄을 부여한다. 결과적으로 균형 잡힌 풍미를 지닌 장기 숙성형 와인을 만드는 데 유리하다. 이 포도밭을 처음 조성한 사람은 바로 앨런 데이비드 히킨보탐(Alan David Hickinbotham)이었다. '호주 양조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앨런 롭 히킨보탐(Alan Robb Hickinbotham)의 아들인 그는 1971년 히킨보탐 클라렌던 빈야드에 쉬라즈(Shiraz), 카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 등을 심었다. 그는 관개를 하지 않는 드라이 파밍(dry farming) 농법을 적용해 최고 품질의 포도를 얻었고, 펜폴즈 그레인지(Penfolds Grange), 하디스 에일린 하디 쉬라즈(Hardy's Eileen Hardy Shiraz) 같은 아이콘 와인이 그의 포도를 사용할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하지만 히킨보탐의 이름으로 병입된 와인이 처음 세상에 나온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2012년 잭슨 패밀리 와인스가 히킨보탐 클라렌던 빈야드를 매입한 이후였다. 그전까지는 그저 포도밭 이름으로 명기되는 경우가 있었을 뿐, 히킨보탐의 이름을 전면에 내세운 적은 없었다. 2000년 맥라렌 베일에 위치한 양가라 에스테이트(Yangarra Estate)를 매입한 잭슨 패밀리 와인스는 양가라의 총책임자였던 피터 프레이저(Peter Fraser)에게 또 다른 빼어난 포도밭을 물색해 줄 것을 의뢰했다. 마침 앨런 데이비드 히킨보탐이 세상을 떠나며 히킨보탐 클라렌던 빈야드가 매물로 나왔고, 피터 프레이저는 남호주 전체에서 최고의 빈야드로 평가되는 이 포도밭을 놓치지 않았다.
히킨보탐 클라렌던 빈야드는 뛰어난 포도밭이었지만, 2012년 당시에는 토양과 기후에 어울리지 않는 품종들도 일부 식재돼 있었다. 이에 2014년부터 소비뇽 블랑(Sauvignon Blanc), 피노 누아(Pinot Noir) 등 적합하지 않은 품종을 쉬라즈나 카베르네 소비뇽 등으로 교체해 나갔다. 또한 각 포도밭을 블록 별로 구분해 토양, 지형, 미세기후 등을 연구하고, 테루의 특징에 맞는 품종과 클론을 선별해 식재했다. 이렇게 구분된 각 블록에는 고유번호가 있으며, 개별 포도나무 단위까지 세심하게 관리한다. 이렇게 9년 동안 지속해 온 연구와 노력은 단발성이 아니며, 앞으로도 더 좋은 와인을 만들기 위해 지속적으로 수행할 예정이다. 모든 블록은 어떠한 화학 비료나 제초제, 살충제 등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 대신 생태계의 균형을 맞추고 생물 다양성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관리하고 있으며 2019년부터 유기농, 바이오다이내믹 농법을 적용 중이다.
론 품종 스페셜리스트와 보르도 품종 스페셜리스트의 만남
히킨보탐 클라렌던 빈야드에는 쉬라즈 같은 론 품종과 카베르네 소비뇽, 메를로 등의 보르도 품종이 고르게 잘 자란다. 그런 면에서 오랜 친구이자 각 분야에서 최고로 인정받는 두 와인메이커는 최적의 조합이라고 할 만하다. 크리스 카펜터(Chris Carpenter)는 보르도 품종을 사용한 와인 양조의 대가로, 미국 나파 밸리의 컬트 와인 카디날(Cardinale), 로코야(Lokoya), 라 호타(La Jota), 마운틴 브레이브(Mt. Brave) 등을 만든 인물이다. 근면 성실한 성격의 그는 특히 높은 고도에서 재배한 포도를 사용해 최적의 밸런스를 갖춘 와인을 잘 만들어 '마운틴 맨(mountain man)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또 다른 와인메이커 피터 프레이저는 쉬라즈, 그르나슈(Grenache) 등 론 품종의 대가다. 양가라 에스테이트에서 20년 이상 경력을 쌓은 그는 2016년 제임스 할리데이(James Halliday)로부터 올해의 와인메이커(Winemaker of the Year)에 선정되기도 했다. 특히 디테일에 강점이 있어 배럴 한 두 개의 블렌딩까지도 섬세하게 초절하여 최적의 풍미를 이끌어낸다. 이 둘의 조합은 특히 히킨보탐의 아이콘 와인 더 피크(The Peake)를 통해 극대화된다. 초기 히킨보탐의 생산 라인업을 고민하던 둘은 원래 와이너리의 최고급 와인을 카베르네 소비뇽과 메를로(Merlot) 블렌딩으로 만들 예정이었다. 그러나 카베르네 소비뇽과 쉬라즈 블렌딩인 펜폴즈 빈60A(Penfolds BIN 60A)를 함께 맛보면서 생각이 바뀌었다고 한다. 최고의 쉬라즈와 카베르네 소비뇽을 재배하는 히킨보탐이라면 엄청난 품격과 숙성 잠재력을 지닌 아이콘 와인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의기투합한 그들이 만들어 낸 더 피크(The Peake)는 과연 호주를 대표하는 위대한 와인이라고 할 만하다. 절친인 그들은 최근 펜데믹으로 자주 만날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항공으로 샘플을 주고받으며 의견을 교환하며 와인을 만든다고 한다.
호주 최고의 포도밭에서 두 명의 대가가 함께 만드는 위대한 와인 히킨보탐. 기회가 된다면 꼭 한 번 경험해 보길 바란다. 그랑 크뤼라는 표현이 무색하지 않은 와인임을 즉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세미나에 소개된 와인들을 소개한다.
히킨보탐, 브룩스 로드 쉬라즈 2019 Hickinbotham, Brooks Road Shiraz 2019
2019년 빈티지는 건조한 겨울과 봄, 그리고 대단히 더운 여름이 이어졌다. 그래서 수확량은 적지만 풍미의 집중도가 높은 와인을 생산할 수 있었다고 한다. 손 수확한 쉬라즈의 줄기를 제거해 절반만 파쇄한 포도를 뚜껑을 덮지 않은 발효조에서 20일간 부드럽게 침용한 후 프리런 주스만 500리터 프렌치 오크 배럴(30% new)로 옮겨 12개월 동안 숙성한다. 이후 25 헥토리터 푸드르와 18 헥토리터 달걀 모양 콘크리트 숙성통(concrete egg)에서 6개월 추가 숙성한다. 와인메이커는 피터 프레이저.
은은한 제비꽃 아로마에 완숙한 블랙베리, 블루베리 풍미에 민트 허브와 후추 향이 아주 가볍고 세련되게 더해진다. 입에 넣으면 산뜻한 미감에 신선한 신맛, 부드러운 타닌이 인상적이다. 정향과 시나몬, 다크 초콜릿 힌트에 짭조름한 여운이 길게 남는 매력적인 쉬라즈.
히킨보탐, 리바이벌리스트 메를로 2016 Hickinbotham, Revivalist Merlot 2016
설립 초기 크리스 카펜터가 피터 프레이저와 함께 포도밭을 둘러보던 중 한 블록을 가리키며 품종을 물었다고 한다. 그 블록은 해발 220-245m에 위치한 서향 포도밭으로, 품종은 1989년과 1976년 식재한 올드바인 메를로였다. 최근 메를로 품종의 인기가 하락세라 곧 뽑아낼 예정이라고 피터 프레이저가 덧붙이자, 크리스 카펜터가 극구 말리며 이 메를로로 최고의 와인을 만들 수 있다고 단언했다고 한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 와인을 마세토(Masseto)나 페트뤼스(Petrus)에 비견할 정도라니, 그 말은 곧 사실이 된 셈이다. 이날 웨비나를 진행한 안드레스 아라곤 씨가 소믈리에로 근무하던 당시 레스토랑 와인 리스트에 올린 호주 메를로는 딱 3개였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이 와인이었다고. 아로마틱하면서도 입 안에서 집중도가 느껴지는 최상급 메를로다. 빈티지 상황에 따라 쁘띠 베르도(Petit Verdot) 품종을 일부 섞어 타닌과 구조감을 강화하기도 한다. 2016년 빈티지는 메를로만 100% 사용했다. 손 수확한 포도의 줄기를 제거해 부드럽게 파쇄한 다음 효모 첨가 없이 21일간 침용 및 발효한 후 프리런 주스와 바스켓 프레스로 가볍게 압착한 주스만 보르도에서 만든 배럴(25% new)에서 15개월 숙성했다. 와인메이커는 크리스 카펜터.
코를 대면 은은한 담뱃잎과 부엽토, 잘 익은 씨간장 같은 뉘앙스가 고혹적으로 드러난다. 입안에서는 달콤하고 부드러운 질감과 함께 잘 익은 검은 베리, 프룬 풍미가 편안한 인상을 선사한다. 감칠맛이 월계수, 감초, 검은 올리브, 초콜릿 뉘앙스와 함께 긴 여운을 남기는 원숙한 느낌의 귀부인 같은 메를로.
히킨보탐, 트루맨 까베르네 소비뇽 2016 Hickinbotham, Trueman Cabernet Sauvingnon 2016
카베르네 소비뇽은 크리스 카펜터의 주종목이라고 할 수 있는 품종이다. 히킨보탐의 카베르네 소비뇽은 무더운 바로사 밸리와 서늘한 쿠나와라 사이의 중간 정도라고 생각하면 쉽다. 잘 익은 과일 풍미와 함께 적절한 허브와 스파이시함이 공존한다. 안드레스 아라곤 씨는 히킨보탐의 카베르네 소비뇽이 호주에서 가장 위대한 카베르네 소비뇽이라고 생각한다고. 손 수확한 카베르네 소비뇽의 줄기를 제거한 다음 부드럽게 파쇄한 포도를 뚜껑을 덮지 않은 발효조에서 18일간 부드럽게 침용한 후 프리런 주스와 바스켓 프레스로 가볍게 압착한 주스만 보르도에서 만든 배럴(75% new)에서 15개월 숙성했다. 와인메이커는 크리스 카펜터.
코에 대는 순간 명확한 블랙커런트와 민트 향기가 '나 카베르네 소비뇽이야'라고 외치는 것 같다. 검은 베리 풍미와 매콤한 스파이스, 가벼운 토양 힌트가 가볍게 더해지며, 입에 넣으면 촘촘한 타닌과 명확한 신맛이 탄탄한 구조감을 형성한다. 은은한 바닐라 뉘앙스가 기분 좋게 감돌아 유혹적인 여운을 남기는 와인. 숙성 잠재력 또한 충분해 보인다.
히킨보탐, 더 피크 2016 & 2018 Hickinbotham, The Peake 2016 & 2018
카베르네 소비뇽과 쉬라즈를 블렌딩해 만드는 히킨보탐의 아이콘 와인, 더 피크. 2016년과 2018년 빈티지를 비교 시음했다. 대부분 호주 와인 하면 쉬라즈를 먼저 떠올리지만, 사실 호주 와인의 리얼 클래식은 카베르네 쉬라즈(Cabernet Shiraz) 블렌드다. 과거에는 보르도의 유명 와이너리들도 자신의 와인에 에르미타주(Hermitage)에서 생산한 시라(syrah)를 일부 블렌딩 해 컬러와 타닌, 풍미를 강화했다는 사실 또한 상기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보르도 품종 전문가 크리스 카펜터와 론 품종 전문가 피터 프레이저의 만남 자체가 이 와인이 탄생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더 피크'라는 이름음 19세기 중반 클라렌던에 최초로 포도밭을 일군 에드워드 존 피크(Edward John Peake)의 이름에서 따 왔다. 가장 좋은 블록에서 재배한 카베르네 소비뇽과 쉬라즈를 55:45라는 전통적인 비율로 사용한다. 손 수확한 카베르네 소비뇽과 쉬라즈의 줄기를 제거한 후 각각 최소 17일 이상 침용 및 발효한다. 카베르네 소비뇽은 보르도 배럴, 쉬라즈는 펀천(puncheon) 및 바리크(barrique)에서 숙성해 가장 뛰어난 배럴들만 골라 블렌딩한다. 안드레스 아라곤 씨는 2018 빈티지의 경우 질감이 나긋나긋하고 밸런스가 좋아 바로 마시기도 아주 좋은 반면, 2016 빈티지는 구조가 견고해 장기 숙성에 큰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
더 피크 2018 빈티지는 상쾌한 허브와 가벼운 스파이스 아로마가 밀도는 높지만 은은하게 드러나는 블루베리, 검은 체리 풍미와 어우러져 우아하고 기품 있는 첫인상을 선사한다. 입에 넣으면 부드러운 질감과 은근하지만 명확히 드러나는 타닌, 우아한 산미와 잔잔하게 드러나는 과일 풍미가 완벽한 밸런스를 이뤄 즉각적인 쾌락을 선사한다. 지금 바로 마시기도 완벽하지만 앞으로 10년 이상 숙성을 통해 아름답게 변화해 갈 것으로 보인다.
더 피크 2016 빈티지는 약간 닫힌 듯 단단한 첫인상과는 달리 입에 넣는 순간 진한 검은 베리와 블랙커런트 풍미가 밀도 높게 드러난다. 촘촘하고 쫀쫀한 타닌과 아찔한 산미가 견고한 구조를 형성하며, 벨벳 같은 질감 속에 숨겨진 강인한 힘을 느낄 수 있다. 바로 즐기기보다는 최소 5년 정도 숙성한 후에 마셔야 이 와인의 잠재력을 제대로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이후에도 20년 이상 아름답게 변화해 갈 와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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