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2월 나파 밸리를 방문했을 때, 시간에 쫓겨 마감 시간 10분 전에 헐레벌떡 뛰어들어갔던 하이츠 셀라. 보통은 그렇게 들어가면 정신이 없어서 와인을 제대로 느끼기 어려운데, 하이츠 셀라의 와인들은 엔트리 급부터 마르타스 빈야드까지 하나같이 맛있고 품격이 넘쳤다. 국내엔 수입되지 않는 포트 와인까지도... 게다가 나파 밸리 와이너리 중에는 이례적으로 시음비가 무료였다. 하긴, 그 와인을 현장에서 맛본다면 구매하지 않을 수 없을 거다. 그때 사 온 마르타스 빈야드 2003년 빈티지를 재작년에 열었는데, 너무 빨리 열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또 기회가 있을까?
나파 밸리 테루아에 대한 60년 철학을 담은 리얼 클래식 와인, Heitz Cellar Lot C-91
하이츠 셀라는 1961년 조 하이츠(Joe Heitz)가 설립한 이래 60년을 한결같이 나파 밸리(Napa Valley)의 테루아를 고스란히 드러내기 위해 정진해 왔다. 1966년 나파 밸리 최초의 싱글 빈야드 와인 마르타스 빈야드 카베르네 소비뇽(Martha’s Vineyard Cabernet Sauvignon)을 출시했을 당시 사람들은 그저 가격을 올리기 위한 꼼수가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지만, 하이츠 셀라는 묵묵히 그들의 길을 걸으며 나파 밸리의 독특한 개성을 담아내는 프리미엄 와인을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미국 와인에 대한 전 세계의 인식을 바꿔 놓은 1976년 ‘파리의 심판(Judgement of Paris)’ 테이스팅에 참여할 기회를 얻었고, 10년 후 <와인 스펙테이터(Wine Spectator)>가 파리의 심판 10주년 기념으로 진행한 리바이벌 테이스팅에서 당당히 1위를 차지함으로써 그들의 철학이 틀리지 않았음을 입증했다. 마르타스 빈야드는 특유의 민트 향을 중심으로 나파 밸리 카베르네 소비뇽의 순수한 품격을 섬세하면서도 강렬하게 표현하는 와인이다. <와인 스펙테이터>는 마르타스 빈야드 카베르네 소비뇽 1974년 빈티지를 ‘20세기의 와인 12선’에 선정하며 이 와인이 지닌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다시 한번 인증했다.
싱글 빈야드 와인을 만든다는 것은 단지 개별 포도밭의 포도만 사용한다는 표면적 의미 이상의 함의를 갖는다. 싱글 빈야드 와인은 최고가 아니라 완벽을 추구하는 것이다. 다른 와인과 비교할 수 없는 고유의 가치를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각각의 테루아를 제대로 표현하기 위한 방법을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며, 남들과 경쟁하기보다는 자신과의 고독한 싸움을 반복해야 한다. 테루아 와인을 만들기 위해 하이츠 셀라가 설립 초기부터 지켜 온 방식은 바로 유기농법이었다. 지금이야 유기농법을 사용하는 생산자가 많지만, 당시는 제초제와 살충제 등 온갖 화학 제품을 사용하는 것이 손쉽게 질 좋은 포도를 얻을 수 있는 방법으로 인식되던 시절임을 감안하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50년 넘게 유기농의 노하우를 쌓아 온 하이츠 셀라의 포도밭에서 나무들은 땅속 깊이 뿌리를 박고 토양과 빈티지의 특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양질의 포도를 생산한다. 현재 하이츠 셀라는 마르타스 빈야드 외에도 트레일사이드 빈야드(Trailside Vineyard), 린다 폴즈 빈야드(Linda Falls Vineyard) 등 세 가지 '싱글 빈야드 카베르네 소비뇽'을 생산하고 있으며, 이 포도밭들은 모두 미국 농무부 산하 기관 CCOF(California Certified Organic Farmers)의 유기농 인증을 받았다. 현재 바이오다이내믹 농법도 적용 중인데, 어쩌면 나파 밸리 최대의 바이오다이내믹 인증 와이너리가 탄생할지도 모른다.
또한 그들은 레이블에 적힌 싱글 빈야드에서 재배한 카베르네 소비뇽만 100% 사용한다. 카베르네 소비뇽 와인에 카베르네 소비뇽만 사용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니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파 밸리 와인은 보통 특정 품종을 85% 이상 사용하면 해당 품종만 레이블에 표기할 수 있다. 레이블에 카베르네 소비뇽이라고 적힌 와인을 샀더라도 최대 15%까지 다른 품종이 섞였을 수 있다는 얘기다. 싱글 빈야드도 사정은 비슷하다. 싱글 빈야드의 이름이 적혀 있더라도 5%는 다른 밭에서 재배한 포도를 사용할 수 있다. 하이츠 셀라는 개별 싱글 빈야드의 순수한 테루아를 가장 잘 드러내는 품종이 카베르네 소비뇽이라고 생각하고, 카베르네 소비뇽이 각각의 포도밭 고유의 테루아를 온전히 표현할 수 있도록 해당 포도밭의 카베르네 소비뇽만 사용해 와인을 양조한다. 마치 부르고뉴의 개별 포도밭들이 피노 누아(Pinot Noir) 품종만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과 같은 이치다.
또 하나 주목할 만한 사실은 젖산 발효(malolactic fermentation)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젖산 발효는 사과산을 젖산으로 바꾸어 신맛을 낮추고 부드러운 질감을 부여하기 위해 프리미엄 레드 와인을 만들 때 대부분 거치는 과정이다. 하지만 하이츠 셀라는 카베르네 소비뇽의 생동감과 강렬한 풍미를 그대로 드러내기 위해서 젖산 발효를 하지 않는다. 대신 출시 초기 느껴질 수 있는 거친 인상을 완화하기 위해 비교적 긴 숙성 기간을 거친다. 싱글 빈야드 와인들은 3~4년의 오크 숙성을 포함해 보통 5년 정도 숙성 후 출시한다. 때문에 신선함이 잘 살아있어 바로 즐길 수 있으면서도 몇십 년 이상 아름답게 변화해 가는 최상급 와인이 되는 것이다. 포도밭의 개성을 명확히 갖춘 것은 물론이다.
이렇게 나파 밸리의 테루아를 담은 클래식 카베르네 소비뇽을 만들어 온 하이츠 셀라의 철학과 전통을 오롯이 담아낸 또 하나의 프리미엄 와인이 탄생했다. 하이츠 셀라 창립 60주년 기념으로 출시된 LOT C-91 카베르네 소비뇽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LOT C-91은 50여 년 전 설립자 조 하이츠가 러더포드(Rutherford), 오크빌(Oakville), 세인트 헬레나(St. Helena), 하우웰 마운틴(Howell Mountain) 등 나파 밸리 주요 마을의 최상급 구획에서 엄선한 포도를 블렌딩해 만든 프리미엄 와인에 기원을 두고 있다. 이 와인은 1969년 딱 한번 생산된 후 자취를 감추었는데, 현재 하이츠 셀라의 헤드 와인메이커 브리타니 셔우드(Brittany Sherwood)가 남아 있는 조 하이츠의 노트와 몇 병의 와인을 분석해 이 와인을 부활시켰다.
4개 마을에서 재배한 카베르네 소비뇽을 함께 사용했지만, 역시나 지향점은 테루아의 표현이다. 빼어난 네 마을의 포도를 절묘하게 블렌딩 해 나파 밸리 카베르네 소비뇽의 전형적인 특징을 드러내는 와인을 완성한 것이다. 전통적인 바롤로(Barolo)를 만들 때 다양한 마을이나 포도밭에서 재배한 네비올로(Nebbiolo)를 블렌딩 했던 것과 궤를 같이 한달까. 2년 동안의 오크 숙성에는 새 오크와 재사용 오크, 커다란 캐스크와 작은 바리크를 골고루 사용해 밀도 높은 과일 풍미에 미묘한 오크 뉘앙스를 더하며, 병입 후 다시 1년 이상의 숙성해 출시한다. 처음 출시된 LOT C-91 2016 빈티지는 제임스 서클링(James Suckling, JS) 96점, <와인 스펙테이터(WS)> 93점을 받으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실제로 시음해 보니 코를 대는 순간 향긋한 꽃 향기와 섬세하게 곁들여지는 프레시 허브 아로마에 눈이 번쩍 뜨인다. 입에 넣으면 영롱한 붉은 베리와 검은 베리 풍미를 중심으로 은은한 바닐라와 가볍게 감도는 후추, 신선한 파프리카 힌트가 조화롭게 드러난다. 촘촘하지만 한없이 부드러운 타닌은 신선한 신맛과 탄탄한 구조를 이루어 깔끔하면서도 긴 여운을 남긴다. 단아면서도 복합적인 풍미를 지닌 리얼 클래식 와인이다.
하이츠 셀라의 나파 밸리 테루아에 대한 60년 철학이 담긴 LOT C-91. 와인 애호가라면 꼭 한번 만나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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