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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공부/와인21 기고

article 171. 순대, 와인과 만나다

by 개인 척한 고냥이 2020. 4. 5.

개인적으로 순대와 와인 페어링을 상당히 선호하는 편이다. 특히 보졸레나 피노 누아 같은 가볍고 붉은 과일향이 은은한 농가 향과 함께 드러나는 스타일의 와인이라면 순대와 찰떡궁합이다. 리슬링 같은 화이트나 스파클링 와인도 좋다. 아아, 생각하니 또 먹고 싶다.

원문은 wine21.com에서 확인하실 수 있으며 본 포스팅은 작성자 본인의 블로그 스크랩입니다.

 

 

순대, 와인과 만나

10여 년 전쯤이었나. 불현듯 휴가를 내고 친구 집을 찾았다. 하늘은 꾸무럭하고 비가 오락가락하는 번거로운 날씨. 가볍게 놀러 가는 길인데 대단한 걸 준비하긴 좀 그렇고, 뭘 좀 사갈까 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분식을 파는 노점이 눈에 띄었다. 점심을 먹은 직후였기에 순대와 튀김을 조금씩 샀다. 갑자기 찾아온 나를 반갑게 맞아준 친구와 함께 대뜸 낮술 시작. 어미 아비도 못 알아본다는 낮술이 아니라 일찍 마셔서 잠들기 전이면 가뿐하게 깬다는 적절한 낮술이다. 준비한 음식과 과일로 질펀하게 판을 벌이고 막잔에 와인을 따라 마시기 시작했다. 준비한 와인은 부르고뉴 파스투그랭(Bourgogne Passetoutgrain). 피노 누아(Pinot Noir)에 가메(Gamay) 품종을 섞어서 만드는 대중적인 일상 소비용 와인이지만 영롱한 체리와 달콤한 딸기 풍미에 기분이 들뜨고 몸이 흥청거렸다. 좋구나.

 

흐린 하늘에 흩뿌리는 비는 술맛을 더욱 돋우고, 기분좋은 담소와 함께 첫 잔이 사라져 갔다. 그리고 입가심으로 순대를 하나 집었는데, 어라, 순대가 이렇게 와인이랑 잘 맞았었나. 당면의 달달함과 선지의 고소함, 그리고 갖은양념의 조화가 가벼운 레드 와인의 풍미와 더할 나위 없이 딱 맞았다. 와, 친구도 나도 젓가락질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더불어 술병은 술술 비어만 간다. 순대 한 점에 와인 한 모금. 순식간에 순대 한 접시가 사라졌다. 왜 좀 더 사지 않았던가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와인 안주로써 순대의 가치를 발견한 순간이었다. 이후 순대와 함께 와인을 즐겨 마시기 시작했다. 실제 경험해 본 바로는 시중에서 쉽게 살 수 있는 당면 순대는 부르고뉴 피노 누아(혹은 신세계 피노누아도 OK), 보졸레(Beaujolais), 발폴리첼라(Valpolicella), 키안티(Chianti) 등 가벼운 레드 와인은 물론 리슬링(Riesling)이나 그뤼너 벨트리너(Gruner Veltliner), 소비뇽 블랑(Sauvignon Blanc) 같은 화이트 와인과도 두루 잘 어울린다. 당면 대신 찹쌀과 고기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고 선지의 비율이 높은 전통순대의 경우 아르헨티나 말벡(Malbec)이나 남부 론(Southern Rhone), 랑그독-루시옹(Languedoc-Roussillon) 와인과도 잘 맞는다. 순대와 함께 먹는 간과 허파, 오소리감투 같은 내장은 피 같이 진한 토로(Toro)나 리베라 델 두에로(Ribera del Duero)의 템프라니오와 찰떡궁합이다. 주변에서 쉽게 살 수 있는 순대가 사실은 와인의 친구였던 셈이다.

 


 

한국인의 소울 푸드, 순대와 와인의 만남

순대는 떡볶이와 함께 한국인의 소울푸드로 꼽힐 정도로 사랑받는 음식이다. 떡볶이는 매콤함이 매력이지만 바로 그 점이 와인과 함께할 때는 핸디캡이 된다. 쫀득한 질감을 타고 입안 가득 퍼지는 매운맛은 와인의 풍미를 완전히 눌러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순대는 다르다. 동물의 내장에 선지와 함께 각종 소를 채워 넣은 순대는 그 자체로 훌륭한 와인 안주가 된다. 얼마 전 대학로에 위치한 순대실록에서 다시 한번 순대와 와인의 조화를 확인할 수 있었다.

 


 

와인21 기자단과 블로거들이 모여 순대와 함께 다양한 와인을 즐기는 자리. 순대실록은 모둠순대, 순댓국, 순대 철판볶음 등 일반적인 메뉴와 함께 순대 스테이크와 같은 신개념 메뉴도 맛볼 수 있는 곳이다. 특히 순대 스테이크는 풍부한 고기와 각종 야채에 견과류를 넣은 독특한 순대를 철판에 구워 고소함을 배가시킨 이 집의 대표 메뉴. 순대 스테이크와 가장 잘 어울리는 와인이 무엇 일지에 참석자들의 관심이 모아졌다. 다수의 마음을 사로잡은 와인은 가볍고 청량하며 적당한 신맛과 약간의 단맛이 매력적인 프로세코(Proseco). 라 마르카(La Marca) 프로세코는 순대 스테이크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순대나 수육, 철판볶음과도 무난하게 잘 어울렸다. 달콤한 소스와 상승효과를 만드는가 하면 진한 양념이나 기름진 느낌은 깔끔하게 씻어주는 역할도 한다. 고스트파인 피노누아 같은 비교적 풍미가 가볍고 허브 뉘앙스를 풍기는 와인 또한 순대와 좋은 궁합을 보였다.

 


 

 

선지맛이 진한 순대에는 ‘강화’ vs. ‘완화’

또 하나의 하이라이트는 ‘1877 순대’와의 매칭. 메뉴판에도 나와 있지 않은 이 특별한 순대는 조선 말기 조리서 <시의전서(是議全書)>의 도야지순대를 그대로 재현한 것이라고 한다. 선지의 질감과 진한 풍미가 그대로 드러나며 잣을 한 톨 올려 함께 먹으면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하지만 피가 뚝뚝 떨어질 것만 같은 비주얼부터 강한 맛에 이르기까지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음식이다. 이렇게 선지를 듬뿍 쓴 순대라면 와인은 어떤 것이 좋을까. 진한 선지의 맛을 그대로 느끼고 싶다면 피노 누아나 바롤로와 같이 무겁지 않고 미묘한 뉘앙스를 풍기는 와인이 제격이다. 만약 선지의 느낌을 살짝 누그러트리고 싶다면 완숙 과일의 풍미와 단맛을 지닌 호주 쉬라즈(Shiraz)나 캘리포니아 진판델(Zinfandel)을 곁들이는 것이 좋겠다. 참고로 프랑스 샤블리(Chablis) 지역을 방문했던 한 참석자는 현지에서 피순대(boudin)와 샤블리 와인을 함께 마셨는데 의외로 단정하게 어울리는 느낌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취향에 따라 도전적인 매칭을 시도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의외의 발견, 들깨가루와 보르도 레드

순대집에 가면 쉽게 볼 수 있는 양념 중 하나가 들깨가루다. 한 수저 듬뿍 퍼서 순댓국에 넣거나 순대볶음 위에 뿌려 먹으면 잡내는 잡아주고 고소함은 배가된다. 그런데 이 들깨가루가 보르도(Bordeaux) 레드와 어울린다! 호기심 강한 참석자가 처음 시도하고 감탄사를 내뱉은 이 매칭은 금세 다른 참석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냈다. 마치 깨강정을 만들듯 순대 표면에 들깨가루를 바른 후 로난 바이 끌리네(Ronan by Clinet) 레드와 함께 마시니 프루티함은 배가되고 깨의 고소함과 순대의 스파이시함이 함께 살아났다. 보르도 레드와 들깨라니, 상상하지 못했던 조합이다. 이외에 순대 철판볶음과 소테른(Sauternes)도 은근히 잘 어울렸다. 적당한 매운맛을 소테른의 농밀한 단맛이 잘 다스렸기 때문. 디저트 문화가 발달하지 않은 데다 매운 음식을 선호하는 한국의 식문화에서 소테른 등 스위트한 와인들을 즐기는 하나의 대안으로 고려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순대와 같은 생활속의 음식들은 와인을 좀 더 편안하게 즐길 수 있도록 해 주는 좋은 동반자다. 귀갓길에 산 순대에 주말에 사놓은 와인을 곁들인다면 좋지 아니한가. 그 어떤 귀차니스트라도 손쉽게 즐길 수 있는 간편한 주안상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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