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을 먹을 때 용도에 맞는 그릇이 중요한 것처럼, 음료를 즐길 때 전용잔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어떤 잔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맛도, 만족감도 확연히 달라진다. 정말로.
원문은 wine21.com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본 포스팅은 작성자 본인의 블로그 스크랩입니다.
맥주, 스타일 별 전용잔에 즐겨라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청춘 남녀들이 맥주를 병째, 혹은 캔째 톡 따서 시원하게 쭉 들이키는 장면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심지어 맥주 광고에서도 알만한 스타들이나 선남선녀들이 멋진 조명 아래서 캔을 손에 들고 몸을 흔들고 있다. 이런 모습이 자유롭고 즐거워 보일지는 모르지만 맥주 맛을 제대로 즐기는 데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일단 맥주가 캔이나 병에 담겨 있으면 매력적인 컬러와 풍성한 거품의 아름다움을 즐길 수가 없다. 게다가 맥주의 향이 마음껏 피어나기에는 병이나 캔의 주둥이가 너무 좁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그저 취하기 위해 마시는 것이 아니라면 제대로 된 잔에 따라 마시는 것이 맥주를 제대로 즐기는 방법이다.
사실 맥덕들 사이에는 이미 잔의 중요성이 잘 알려져 있다. 맥주 꽤나 마신다는 사람들은 스타일 별로, 혹은 브랜드 별로 잔을 모은다. ‘맥덕=잔덕’인 경우도 많다. 최근 국내에도 브랜드 별 전용잔이 많이 소개되어 구하기가 어렵지 않다. 대형마트 진열대에는 전용잔 패키지들이 잔뜩 쌓여 있고, 보틀샵 등에서는 트라피스트 비어(trappist beer) 전용잔 등 비교적 특별한 잔들을 판매하거나 구매 고객들에게 증정한다. 견물생심이라고 전용잔을 모으다 보면 좋아하는 브랜드의 잔은 모두 가지고 싶어 진다. 심지어 A브랜드의 맥주를 B브랜드 전용잔에 따라 마시면 안 될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자신은 맥덕이 아니라 잔덕이라고 선언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문제는 전용잔들의 부피가 크다 보니 모으면 모을수록 보관할 곳이 없어진다는 점이다. 혼자 사는 혼술러라면 맥주잔이 찬장을 넘어 책장과 책상까지 뒤덮을 수도 있다. 가족과 함께 산다면 어머니(혹은 배우자)의 등짝 스매싱 위협과 잔소리에 시달릴 것이다. 물론 동거인도 맥덕이라면 구박이야 면하겠지만 문제의 규모가 두 배 이상으로 확장될 위험이 있다.
그렇다고 아무 잔에나 마시기엔 아쉽다. 적절한 잔은 맥주를 맛있게 마시도록 도와주는 도구일 뿐만 아니라, 맥주를 마시는 즐거움을 더하는 중요한 요소다. 후각과 미각적인 즐거움을 극대화하는 동시에 시각과 촉각, 청각적인 즐거움까지 주기 때문이다. 잔의 모양에 따라 느끼는 감상이 다를 뿐더러 맛과 향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얘기다. 잔 테두리(rim)의 너비와 보울(bowl)의 크기는 맥주 향에 영향을 미치고, 잔의 높이와 너비는 맥주 안의 탄산에 영향을 주어 촉감을 변화시킨다. 전통적으로, 혹은 연구를 통해 다양한 맥주 스타일에 맞는 (혹은 그저 사용하기 쉬운) 전용잔들이 개발되어 왔다. 대중적인 맥주집에서 사용하는 500ml 머그잔부터 실린더 형태의 잔, 다리와 받침(stem & base)이 달린 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잔들이 존재한다. 주요 잔들의 특징과 그에 걸맞은 맥주 스타일을 간단히 살펴보자.
①파인트(Pint)
파인트는 미국이나 영국 등지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맥주잔이다. 우리나라에서도 크래프트 비어 전문점 등에 가면 맥주가 파인트로 제공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하지만 싸고 세척과 사용이 편하다는 것 외에 큰 장점은 없어 보인다. 아, 크기가 표준적이라는 것도 장점이라면 장점. 사실 파인트는 그저 부피의 단위 아니던가.
②노닉 파인트(Nonic Pint)
일반적인 파인트 잔의 테두리 바로 아래에 돌출된 귀 같은 것이 붙어 있다. 그 귀 때문에 포개 놓았을 때 잔끼리 들러붙지 않아 이가 잘 나가지 않기 때문에 잔 이름이 ‘흠집 없음(no nick)’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사용하는 입장에선 이 귀 덕분에 관리가 편해지며 그립감이 훨씬 좋아진다. 모양도 왠지 귀여워 보인다. 쭉쭉 들이킬 수 있는 페일 에일(pale ale)이나 세션 비어(session beer) 등에 적절하다.
③임페리얼 파인트(Imperial Pint)
파인트가 몸매관리를 받아 유려한 곡선형으로 탈바꿈했다. 기네스 전용잔으로 익숙한 형태인데 일반 파인트에 비해 그립감이 좋을뿐더러 향을 더욱 잘 모아준다. 에일 계열의 맥주를 마실 때 주로 사용한다.
④필스너(Pilsner)
길고 늘씬한 이 글라스는 필스너 계열 맥주의 질감과 맛을 극대화하기에 최적이다. 긴 접촉 면적이 거품 형성을 돕고 테두리 쪽의 너비가 비교적 좁아 거품(head)의 두께를 두껍게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준다. 필스너의 매력적인 금색 컬러 사이로 피어오르는 시원스러운 버블을 감상하기에도 최적이다. 날렵한 잔을 가볍게 들어 개운하게 쭉 마시기도 좋지 아니한가.
⑤바이젠(Weizen)/바이스비어(Weissbier)
이 잔을 보면 월드컵 트로피가 떠오른다. 특히 헤페바이젠(Hefe-weizen)를 따른 후 풍성하게 올라앉은 거품을 보면 딱 그렇다. 바이젠이 지닌 풍성한 과일과 정향 아로마, 부드러운 질감을 즐기기에도 제격이다. 이제 곧 월드컵이 시작되는데 치맥용으로 라거 대신 바이젠과 바이젠 글라스를 준비해 보는 것은 어떨까.
⑥머그(Mug)
한국의 호프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태의 잔이다. 물론 독일의 넓다란 맥주홀에서도. 두툼하고 견고하며 손잡이가 있어 편리하다. 잔을 높이 들어 건배를 할 때 최적. 혼자 마시더라도 나름 맥주 축제 같은 분위기를 즐길 수 있다. 단점은 너무 무겁다는 것. 잔을 들었다 놨다 할 때마다 팔뚝 근육이 발달하는 것 같다. 그나마 맥주로 섭취한 칼로리가 소비되는 것(같은 기분)은 장점일까. 머그도 높이와 너비, 모양 등이 다양하니 취향에 따라 골라보자. 머그 위에 뚜껑이 달린 슈타인(stein)도 있다.
⑦고블릿(Goblet) / 챌리스(Chalice)
쉽게 말하면 짧은 다리(stem)가 달린 잔이다. 크기와 모양이 다양해서 땅딸막하고 귀여운 잔부터 보울이 크고 근엄한 느낌의 잔까지 천차만별이다. 주로 독일의 복(bock) 비어나 벨지언 에일(Belgian ale)처럼 비교적 묵직한 맥주를 마실 때 사용한다. 특히 트라피스트 맥주들의 전용잔들이 고블릿인 경우가 많다. 일명 ‘성배’ 잔.
⑧튤립(Tulip)
말 그대로 모양이 마치 튤립 봉오리처럼 생긴 잔이다. 맥주의 아로마를 잘 잡아주며 오목하게 들어갔다가 돌출된 테두리는 거품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준다. 홉 아로마와 맥아 풍미를 극대화하기 좋은 잔으로 스코티시 에일(Scotish ale) 발리 와인(barley wine), 스트롱 벨지언 에일(strong Belgian ale) 등에 적합하다. 무엇보다 일반적인 고블릿보다는 예뻐 보인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지 않나.
⑨스니프터(Snifter)
스니프터 역시 다리가 달린 잔인데 고블릿에 비해 보울이 넓고 크다. 일반적으로 코냑이나 브랜디를 즐길 때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맥주용으로는 더블 IPA 등 아로마가 풍부하고 알코올이 높은 맥주에 적합한데 특히 임페리얼 스타우트(imperial stout)를 즐길 때 제격이다. 향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결코 잔을 가득 채워서는 안 된다. 향기를 채울 공간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이외에 쾰른 지역의 라거 같은 에일인 쾰쉬(Kölsch)를 마실 때 사용하는 슈탕에(stange)나 샴페인 잔과 유사한 플루트(flute) 같은 얇고 긴 잔들도 있다. 하지만 사용성이 적은 편이고 위에 소개한 잔들로 대체 가능하다. 그보다 특별히 소개하고 싶은 잔이 있다. 슈피겔라우의 크래프트 비어 글라스(Spigelau Craft Beer Glasses)다. 와인 애호가라면 익히 알고 있을 그 브랜드, 와인 글라스웨어로 유명한 슈피겔라우 맞다.
슈피겔라우는 글라스의 명가답게 잔의 높이와 크기, 테두리의 크기, 보울의 모양 등 풍미의 전달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요소를 고려하여 최근 인기의 정점에 있는 IPA(India Pale Ale), 스타우트(stout), 밀맥주(American wheat beer) 등의 전용잔을 만들어냈다. 특히 맥주의 스타일별 특징을 잘 이끌어낼 수 있는 최적 형태를 찾기 위해 시에라네바다(Sierra Nevada)와 도그피시헤드(Dogfishhead), 로그(Rogue)와 레프트 핸드 브루잉(Left Hand Brewing), 벨스 브루어리(Bell's Brewery) 등 유명 양조장들과 협업했다. 게다가 2015년엔 권위 있는 디자인상인 레드 닷 어워드(Red Dot Award)를 수상함으로써 그 기능성뿐만 아니라 유려한 디자인까지도 인정받았다.
글라스의 재료 또한 남다르다. 석영 함량이 높은 오스트리아 도프너 광산(Dorfner mine)의 원료를 사용했다. 석영 함량이 높으면 표면이 매끈하고 두께가 얇은 잔을 만들기 수월하다. 얇은 맥주잔은 맥주의 냉기를 더 오래 유지해 맥주를 더 시원하게 즐기는 데 도움을 준다. 게다가 잔을 들 때의 느낌과 입에 닿는 촉감 또한 월등히 좋다. 표면이 매끈해 흠집이 없으면 불순물이나 세균 등이 엉겨붙지 않아 더욱 깨끗한 맛의 맥주를 즐길 수 있다. 튼튼하고 잘 깨지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크래프트 비어 애호가라면 한 세트 정도 갖춰 둘 가치가 있는 잔이다.
맥주 스타일에 맞는 잔을 사용하는 것 만큼 중요한 점은 제대로 사용하는 것이다. 절대 맥주잔을 얼려서 사용하면 안 된다. 잔에 낀 성에가 냉장고 냄새를 흡수할 수 있고, 맥주가 잔에 닿는 순간 얼음 결정이 생겨 거품 형성에도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신선한 맥주를 적정 온도로 보관했다가 깨끗한 잔에 따르는 것으로 충분하다. Enj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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