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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공부/와인21 기고

article 180. 라거 맥주를 위한 변명

by 개인 척한 고냥이 2020. 9. 27.

개인적으로 애정하는 아티클. 처음 크래프트 비어 열풍이 불었을 때 나 역시 IPA와 임페리얼 스타우트에 흠뻑 빠졌었다. 물론 지금도 상당히 좋아하는 편이지만, 마시는 양을 보면 세종과 사워, 일부 트라피스트 맥주를 제외하면 절반을 훌쩍 넘는 것은 역시 라거다. 특히 여름의 라거 소비량은 거의 와인과 맞먹을 정도. 라거가 대중적 인기를 끄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원문은 wine21.com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본 포스팅은 작성자 본인의 블로그 스크랩입니다.



라거 맥주를 위한 변명

무더운 여름. 작렬하는 태양 아래서 땀을 뻘뻘 흘리다 보면 맥주 한 잔이 간절해진다. 반짝이는 황금빛 맥주를 투명한 잔에 따르면 힘차게 솟아오르는 거품. 몇 모금을 연거푸 들이키면 온몸을 타고 짜릿하게 전해지는 쾌감. 생각만 해도 온 몸이 시원해진다. 이럴 때 우리가 떠올리는 맥주, 그것이 바로 라거다.

 

그런데 요즘 라거는 그닥 대우받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최근 애호가들의 관심은 IPA나 임페리얼 스타우트(Imperial Stout), 윗 비어(Wit beer), 세종(Saison) 등 에일 계열의 맥주에 쏠려 있다. 종종 라거는 평범하고 심심하며 밍밍한 맥주로까지 평가절하된다. 일례로 유명한 맥주 평가 사이트인 레이트비어(ratebeer.com)의 Top 50 목록에 라거는 하나도 없다. 반면 최악의 맥주(the worst beer in the world) 카테고리의 대부분은 페일 라거(Pale Lager)가 채우고 있다. 비어애드버킷(beeradvocate.com)의 고평가 맥주(Top Rated Beers) 목록도 마찬가지다. 첫 페이지에 보이는 250위까지의 순위표에 라거의 자리는 없다.

 

정말 라거는 심심하고 맛없는 맥주일까? 그저 무더위에 시원하게 들이킬 때나 의미 있는 보리 음료인 걸까? 하지만 세계적으로 판매되는 맥주의 90% 이상이 라거, 특히 대중적인 페일 라거다. 라거가 단지 밍밍한 보리 음료라면 이렇게 압도적으로까지 세계 맥주 시장을 주도하는 상황을 설명하긴 어렵다. 한국 시장도 다르지 않다. 카스, 하이트, 클라우드 등 대형 메이커가 생산하는 라거뿐만 아니라 ‘4캔 만원’으로 대표되는 수입 맥주 역시 대부분 라거다.

 

 

 

라거, 청량하고 깔끔한 맥주의 대명사

사실 라거는 혁신적인 음료였다. 최근의 크래프트 비어 붐은 에일 맥주가 주도하고 있지만, 200년 전 맥주 혁명의 중심에는 라거가 있었다. 어둡고 탁하며 텁텁한 맥주가 일반적이었던 당시 맑고 청량한 맛의 라거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시작된 라거의 인기는 체코에서 개발된 필스너로 정점에 달했고 순식간에 전세계로 확산되었다. 황금빛 라거가 전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은 것이다. 라거는 누구나 마시기 쉽고 깔끔하다. 어떤 음식과도 충돌하지 않고 무난하게 잘 어울린다. 이런 범용성이 라거의 인기를 견인하는 중요한 속성이다. 하지만 이렇게 섬세한 라거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만큼 세심한 관리와 기술, 그리고 어느 정도의 자본이 필요하다. 또한 맛이 가볍고 개운한 만큼 맛을 내는 재료와 공법, 조건을 세심하게 조절하고 통제해야 원하는 풍미를 이끌어낼 수 있다. 보통 홈 브루잉을 하는 애호가들이 주로 에일 맥주를 만드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가정집에서 라거를 양조하는 게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시긴 쉽지만 만들기는 까다로운 라거 맥주, 어떻게 탄생한 걸까?

 

아래로부터, 라거의 탄생

양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무래도 효모(yeast)다. 당분을 섭취해서 주류의 핵심인 알코올(에탄올)을 만드는 게 효모니까. 라거 양조에 사용하는 효모는 섭씨 5-12도 정도의 비교적 낮은 온도에서 발효하며 아래로 가라앉는 성질이 있다. 그래서 라거를 하면 발효 맥주라고 부른다. 반면에 에일 양조에 사용하는 효모는 상면 발효 효모다. 15-25도 정도의 상온에서 발효하며 효모가 위로 떠올라 거품을 형성한다. 당연히 냉장 기술이 없던 오랜 옛날에 만들던 맥주는 대부분 에일이었다. 또한 더운 여름엔 잡균들의 활동이 왕성해져 맥주가 쉽게 상했기 때문에 맥주를 양조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양조자들은 여름이 오기 전에 맥주를 만들어서 서늘한 동굴이나 지하에 맥주를 저장했다.

 

그런데 사실 효모의 존재를 정확히 알게 된 지는 200도 채 되지 않았다. 19세기가 되어서야 그 유명한 파스퇴르에 의해 미생물이 당분을 먹고 에탄올과 이산화탄소를 배출한다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그 이전까지 발효는 신의 뜻, 혹은 화학적인 변화일 뿐이었다. 발효가 신의 뜻이었던 시절 독일 뮌헨 지역에는 수많은 수도원이 있었다. 도시 이름이 수도사들의 공간을 뜻하는 무니헨(Munichen)에서 유래했다고 할 정도니까. 어쨌거나 뮌헨 남쪽에는 알프스의 산악지대가 펼쳐져 있었고, 맥주를 양조하던 수도사들은 여름이 오면 깊은 산속 시원한 동굴 속에 맥주를 보관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며 이렇게 동굴 속에서 숙성된 맥주가 더 상쾌하고 부드럽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비살균 생맥주’에 남아 있던 효모 중 저온에서 활동한 효모 때문에 생긴 결과였다. 게다가 매년 동굴의 낮은 온도를 반복적으로 견딘 효모만 살아남으면서 수도사들도 모르는 사이에 자연적으로 낮은 온도에서 가라앉아 천천히 발효하는 라거 효모가 배양되었다. 그야말로 신의 은총! 이렇게 뮌헨을 중심으로 한 바이에른 지역은 라거 맥주를 만드는 전통을 확립하게 되었다. 라거라는 말 자체가 ‘저장’을 뜻하는 라게른(lagern)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19세기 중반 이 하면 발효 효모의 존재가 알려지고 이름이 붙여졌다. 사카로미세스 파스토리아누스(Saccharomyces pastorianus). 빵 효모로도 쓰이며 상면 발효를 일으키는 사카로미세스 세레비지에(Saccharomyces cerevisiae)로부터 절반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라거 맥주용 하면 발효 효모다. 세계가 이 효모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라거는 세계 맥주 시장의 꽃이 되었다.

 

어둠을 뚫고 밝은 세상으로 

하지만 19세기 이전까지 독일 바이에른 지역에서 만들던 라거는 검은 빛깔을 띄는 둥켈(Dunkel), 높은 알코올 도수와 진한 맛을 지닌 복(Bock) 비어 등으로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밝고 투명한 라거와는 차이가 있었다. 맥주 양조에 쓰이는 맥아의 색깔이 진했기 때문이다. 맥주를 만들기 위해서는 보리를 적셔 싹을 틔운 후 건조해야 하는데,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이 바로 맥아다. 이 과정에서 보리의 전분이 당으로 바뀌고, 효모가 이 당분을 알코올로 바꾸어 준다. 당시 바이에른에선 맥아를 건조할 때 직접 열을 가했다. 당연히 맥아가 검게 그을리고 연기가 스며들었다.

 

하지만 영국에서는 맥아를 낮은 온도에서 미세하게 조절하여 간접적으로 가열하는 기술로 비교적 옅은 색의 몰트를 만들고 있었다. 그런 몰트로 만든 맥주가 바로 당시에 큰 인기를 구가했던 페일 에일(Pale Ale). 뮌헨의 가브리엘 제들마이어(Gabriel Sedlmayr)와 오스트리아 빈의 안톤 드레허(Anton Dreher)는 영국의 양조장을 방문해 몰래 샘플을 빼돌렸다. 그렇게 새로운 맥아 제조법을 확보한 그들은 바이에른의 전통인 하면 발효 공법을 결합해 각각 메르첸(Märzen, =옥토버페스트비어)과 비엔나 라거(Vienna Lager)라는 앰버 컬러의 라거(Amber Lager)를 개발했다. 한층 밝은 빛과 깔끔한 맛을 지닌 이 맥주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게다가 제들마이어가 후원해 개발한 기계식 냉장 기술은 이 맥주의 확산에 불을 지폈다. 맥주 보관을 위해 지하실이나 동굴을 찾을 필요가 없었고, 여름에도 맥주를 생산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황금빛 라거의 탄생, 필스너

그런데 황금빛 라거의 원조는 독일이 아니다. 원조집의 영광을 차지한 국가는 체코. 현재까지도 전 세계에서 1인당 맥주 소비량이 가장 많은 국가가 체코인 것은 그 때문일까. 옛날부터 체코 사람들의 맥주에 대한 입맛은 까다로웠던 모양이다. 1838년 체코 플젠(Plzen)의 시민들은 맛없는 맥주에 단단히 화가 났다. 그들은 항의의 표시로 광장에 모아 놓은 수십 통의 맥주를 하수구에 쏟아부었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플젠의 양조자들은 절치 부심했다. 바이에른으로부터 라거 효모를 들여왔고 성격은 더럽지만 양조 기술은 훌륭했던 바이에른의 젊은 양조가 요제프 그롤(Josef Groll)을 모셔 왔다.

 

디테일에 강했던 이 젊은 양조가는 플젠이 라거 비어를 만들기에 최적의 환경임을 금세 알아차렸다.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의 질 좋은 보리로 만든 옅은 빛깔의 맥아, 순하고 풍미가 좋은 사츠(Saaz) 홉, 그리고 미네랄 함량이 낮아 홉의 섬세한 풍미를 잘 살려주는 플젠 지역의 연수(軟水)까지. 그롤은 이런 재료들을 결합하여 이제껏 존재하지 않았던 황금빛 맥주를 창조해냈다. 플젠의 맥주, 필스너(Pilsner)다. 은은한 꽃 향기와 드라이하면서도 꿀 같은 뉘앙스, 그리고 쌉쌀하고 깔끔한 여운을 남기는 이 맥주는 순식간에 유럽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너도 나도 필스너를 모방했고 독일에서도 메르첸보다 밝은 헬레스(Helles)와 더 깔끔하고 홉이 강조된 스타일의 독일 필스너(German Pils)가 연이어 등장했다. 또한 이런 스타일이 독일 이민자들에 의해 아메리카 대륙을 포함한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현재

우리가 많이 마시는 맥주들은 거의 이 필스너의 직계, 혹은 방계 자손들이다. 170여 년 전 전세계를 열광시켰던 맥주가 아직까지 그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것이다. 엄청난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인 셈이다. 특히 대세를 형성하고 있는 맥주는 바로  미국식 페일 라거(American Pale Lager)다. 미국식 부가물 라거(American Adjunct Lager)라고도 부르는 이 스타일에는 맥아 외에 옥수수나 쌀 등의 다른 곡물들을 섞어 쓴다. 따라서 맥아의 풍미가 적고 색깔 또한 옅다. 또한 홉의 함량도 낮아서 쌉쌀함도 덜하다. 이런 맥주가 만들어진 이유는 미국 맥주 양조업 설립 초기 맥아와 홉을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인데, 나중에는 원가 절감과 대중적인 입맛에 맞추기 위해서도 이 방법이 선호되었다. 맛이 옅고 쓴맛이 덜했기 때문에 누구나 쉽게 물처럼 마실 수 있어 매출 증대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20세기 내내 큰 인기를 구가했던 이런 스타일의 맥주들은 현재 라거 맥주에 오명을 입히는 주범이 되었다. 필스너의 방계 자손은 악착같이 벌어 자수성가에 성공했으나 세간의 손가락질을 받게 된 것이다. 게다가 아메리칸 페일 라거의 시장 규모가 너무 방대한 나머지 전체 라거를 대표하는 것처럼 인식되어 비아냥은 전체 라거를 향하게 되었다. 프로메테우스의 불처럼 추앙받던 황금빛 라거가 비난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대중의 입맛과 그에 영합한 자본의 논리가 만들어 낸 거대한 물결의 한 갈래일 뿐이다. 라거는 죄가 없다. 라거 함부로 원샷하지 마라. 당신은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빛나는 사람이었느냐.

 

 

 

라거 맥주를 위한 변명

사실 라거는 혁신적인 음료였다. 최근의 크래프트 비어 붐은 에일 맥주가 주도하고 있지만, 200년 전 맥주 혁명의 중심에는 라거가 있었다. 어둡고 탁하며 텁텁한 맥주가 일반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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