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쌀쌀해지니 바야흐로 주정강화 와인의 계절. 물론 스타일에 따라 여름에도 마시기 좋은 주정강화들이 있지만, 아무래도 알코올이 높다 보니 전반적으로는 아무래도 겨울이 주정강화 와인과 어울리는 계절이 아닌가 싶다. 적당한 계절에 스크랩.
원문은 wine21.com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본 포스팅은 작성자 본인의 블로그 스크랩입니다.
주정강화와인(fortified wine). 말 그대로 발효 중, 혹은 발효가 끝난 후에 주정(酒精, 에탄올)을 첨가하여 알코올 함량을 높인 와인이다. 덕분에 ‘주정(酒酊)을 강화하는 와인’이라는 아재개그의 단골 소재가 되곤 하는데, 사실 주정강화와인을 꽐라(?)가 될 때까지 마시긴 쉽지 않다. 일단 알코올 함량이 15%에서 20% 정도로 생각보다 높지 않아 그리 빨리 취하지 않는다. 게다가 그 향과 맛이 독특하고 농밀해 빠르게 많이 마시기도 어렵다. 기껏 마신다 해도 두어 잔 정도가 적당하다. 스타일에 따라 식전주로 입맛을 돋우거나, 식사를 마무리하며 디저트와 함께 한 모금 곁들이는 정도다. 혹은 자리를 옮겨 담배나 시가와 함께 즐기거나, 대화를 나누며 마시기도 한다. 보통 개봉 후에도 1개월 이상 두고 마실 수 있으니 급하게 병을 비울 이유도 없다. 여러 모로 술주정을 일으키기보다는 여유있게 마시며 기분 좋은 취기를 남기는 술에 가깝다. 단순히 알코올을 넣어 도수를 높인 와인이 아니라 ‘알코올을 이용해 와인의 모든 풍미를 강화한 와인’이 바로 주정강화와인이다.
주정강화와인이 유행하게 된 시기는 대략 15세기 이후다. 대체로 긴 항해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대표적인 주정강화와인인 포트(Port)와 셰리(Sherry)는 놀랍게도 보르도(Bordeaux) 와인의 대체상품이었다. 100년전쟁 이후 프랑스와 사이가 벌어진 영국이 좋아하던 보르도 와인 대신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와인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보르도에서 와인을 들여올 때 보다 훨씬 길어진 수송기간 동안 와인의 변질을 막기 위해 브랜디를 첨가한 것이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어냈다. 마데이라(Madeira) 또한 대항해시대 대서양으로 먼 항해를 떠나던 범선들이 마데이라 섬을 기착지로 활용하면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와인이 상하지 않도록 첨가한 알코올과 오랜 기간 후덥지근한 환경에 노출되면서 생성된 독특한 풍미가 오묘하게 어우러지면서 인기를 얻게 된 것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주정강화 와인은 있었다. 13세기 후반 루시옹(Roussillon)에서 몽펠리에 대학의 학장 아르노 드 빌라노바(Arnau de Vilanova)가 발효 과정 중 브랜디를 첨가해 발효를 멈추는 뮈타주(Mutage)를 발견하면서 만들어진 주정강화와인 뱅 두 나튀렐(Vins Doux Naturels, VDN)이 바로 그것이다. 영어로 하면 내추럴 스위트 와인인데, 발효되지 않은 포도의 당분 덕분에 달콤한 맛을 냈기 때문이다. 현재도 루시옹은 전체 VDN의 80%를 생산하고 있다.
탄생과정에서 보듯 주정강화와인은 일반적으로 오래 보관할 수 있는 술이다. 오픈 후 1주일 안에 마셔야 하는 피노(Fino) 계열의 셰리를 제외하면, 일반적으로 개봉 후에도 1~2개월은 충분히 즐길 수 있어 편리하다. 와인은 한 번 따면 다 마셔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고생하는 분들께 최적이다. 장기 숙성에도 유리하다. 보통 빈티지 포트(Vintage Port)는 3-40년은 거뜬히 보관할 수 있으며, 작황이 특히 좋은 해라면 100년 이상 숙성이 가능하다. 빈티지 마데이라(Vintage Madeira)의 경우는 한 술 더 뜬다. 300년 넘은 빈티지 마데이라도 아직 마실 만 하다니 불멸의 와인으로 불릴 만 하다. 영국에서는 자식이나 손주가 태어난 해의 빈티지 포트를 박스로 구매해 인생의 특별한 시기마다 함께 마시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빼어난 빈티지 포트의 변화와 숙성된 풍미를 즐기고 싶은 애주가들에겐 좋은 핑계꺼리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국내 애호가들은 아직 주정강화와인을 즐길 생각이 없어 보인다. 3년 전 쯤 국내에 좋은 셰리와 마데이라들이 대대적으로 소개되었고 그 이전부터 훌륭한 포트 와인들이 꾸준히 수입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정강화와인이 유행의 중심으로 떠올랐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도대체 왜? 일단 유행에 뒤처진 이미지가 문제다. (사실이건 아니건) 달달하다는 이미지가 강해서 드라이한 와인을 선호하는 최근 트렌드와도 잘 맞지 않는다. 달콤한 맛, 혹은 톡 쏘는 향이나 산화 뉘앙스 또한 처음 마시는 사람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기 어렵다. 게다가 어떤 음식과 어떤 자리에서 마셔야 하는지 모르는 경우도 많다.
마침 잘 되었다. 주정강화와인은 특히 요즘처럼 쌀쌀해지는 계절에 제격이니까. 물론 한 여름에 시원하게 마시거나 얼음을 넣어 즐길 수 있는 스타일도 있다. 칵테일 베이스로 이용하는 것도 괜찮다. 그러나 역시 주정강화의 계절은 겨울이다. 적당히 높은 알코올은 추위로 움츠려든 몸을 이완시키고, 부드러운 질감을 타고 전해지는 진한 풍미는 게을러지는 정신을 일깨운다. 서재에서 고독과 함께 즐기는 명상의 술이기도 하며, 홈파티에서 가족과 함께 즐기는 나눔의 술이기도 하다. 이번 주정강화와인 시리즈를 통해 추석을 지나 쌀쌀해지는 가을을 위해, 다가올 겨울을 대비해 준비할 만한 대표적인 주정강화와인 스타일들을 차례로 소개할 예정이다. 첫 주자는 바로... 다음 이 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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