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돈으로 데킬라를 산 게 얼마만인가... 게다가 술집도 아니고 일반 소매점에서 산 건 아마 처음이 아닐까 싶은데. 하지만 오랜만에 산 데킬라가 생각보다 매우 만족스러웠다. 놀라울 정도로.
주인공은 바로 호세 쿠엘보 트라디시오날 레포사도(Jose Cuervo Tradicional Reposado). 흔하디 흔한, 펍이나 바는 물론 마트에 가도 흔히 보이는 게 호세 쿠엘보인데 웬 호들갑이냐고? 아니다, 이건 보통 호세 쿠엘보가 아니다.
일반적으로 많이 보이는 호세 쿠엘보는 왼쪽의 각진 보틀이다. 정확한 이름은 호세 쿠엘보 에스페시알 골드(Jose Cuervo Especial Gold). 2개월 이상 통에서 숙성한 레포사도(Reposado)를 어린 데킬라와 블렌딩해 만든다. 게다가 원료인 블루 아가베를 100% 사용한다는 문구도 없다. (법적으로 51% 이상만 사용하면 데킬라라는 명칭을 붙일 수 있다.)
하지만 오른쪽의 호세 쿠엘보 트라디시오날 레포사도는 100% 블루 아가베로 만들어 오크통에서 2개월 이상 숙성한다. 호세 쿠엘보를 처음 만들었던 수제 방식으로 제조한다고 레이블에도 떡하니 써붙여놨다. 홈페이지 설명에 따르면 '쿠엘보의 오리지널 데킬라, 프리미엄 no. 1 데킬라'라고.
참고로 데킬라는 통 숙성 기간에 따라 세 종류로 나눈다. 첫 번째는 플라타(Plata=Silver)로 숙성을 하지 않는다. 블랑코(Blanco=White), 호벤(Joven=Young)도 같은 의미다. 레포사도(Reposado)는 2개월 이상 1년 미만, 아녜호(Anejo)는 1년 이상 숙성한다.
사족.
위 사진은 2008년에 찍은 것인데 레이블에 분명히 '레포사도'라고 적혀 있다. 언제부터 에스페시알이 레포사도를 섞은 호벤(Joven)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가격은 예전과 유사한 것 같으니 결과적으로 가격이 오른 것으로 봐야 한다. 데킬라도 인기가 오르면서 원액 부족 현상이 생긴 걸까. 단순이 이익률을 높이려는 의도일까. 모를 일이다.
보통 용설란(Agave)으로 만든 술을 데킬라라고 생각하지만 정확히는 재료와 제조 방식, 지역을 한정해야 한다. 일반 용설란으로 만든 증류주는 메즈칼(Mezcal)이며, 용설란을 구워서 쓴다. 데킬라는 지정된 주에서 생산한 푸른 용설란(Blue Agave)만을 사용해 할리스코(Jalisco) 주에서 생산해야 한다. 용설란을 쪄서 사용하며, 2번 이상 증류하도록 정하고 있다. 참고로 용설란을 발효해 만든 탁주는 풀케(Pulque)다.
쿠엘보 패밀리 레시피로 221년간 수제로 만들었단다. 레이블 상단엔 1795년에 설립했다고 쓰여 있으니 이 보틀은 2016년에 만든 거란 얘긴데... 완전 악성 재고;;; 어쨌거나 1795년은 쿠엘보 가문이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4세(King Carlos Ⅳ)로부터 데킬라 생산 면허를 받은 해다. 호세 쿠엘보의 로헤냐 증류소(La Rojeña Distillery)는 1812년 설립해 지금까지 가동 중인 남미에서 가장 오래된 증류소다.
백 레이블엔 관련 내용이 제법 상세하게 적혀 있다. 트라디시오날은 쿠엘보 가문에 의해 만들어진 최초의 레포사도로, 자사 소유의 농장에서 재배한 블루 아가베를 점토 화덕에서 천천히 쪄서 작은 수제 증류기에서 2번 증류한 후 화이트 오크 캐스크에서 2개월 이상 숙성한다. 알코올 함량은 38%로 에스파시알 골드(40%)에 비해 오히려 낮다.
보통 위스키나 브랜디 이외의 증류주는 리델 비늄 스피릿 글라스에 시음하는데, 왠지 데킬라는 샷잔에 마시고 싶어서 그나마 비슷한 잔에 따랐다. 사실은 사케 잔-_-;;; 차게 해서 마시라는데 나는 그냥 상온에서 마셨다. 생각해 보니 데킬라와 진, 보드카는 스트레이트로도 차게 마시는 경우가 많으니 처음부터 냉장고에 보관하는 게 좋을 것 같다.
Jose Cuervo Tradicional Tequila Reposado / 호세 쿠엘보 트라디시오날 데킬라 레포사도
반짝이는 짙은 볏짚 색. 잔에 따를 때부터 스파이스, 침엽수, 바닐라 향이 뒤섞여 올라오며 톡 쏘는 느낌이 명확하면서도 우아하고 부드러운 인상을 남긴다. 입에 넣으면 허브와 후추 향을 타고 흘러들어오는 감칠맛과 은은하게 남겨지는 노란 핵과의 여운. 무턱대고 강하게 찌르는 도전자가 아니라 차분하게 응수하는 무림 고수의 느낌.
프리미엄 데킬라의 진가를 느끼고 나니 다른 프리미엄, 아니 슈퍼 프리미엄 데킬라들도 맛보고 싶어 졌다. 먼저 패트론(Patron)으로 손을 뻗쳐야 할까...
개인 척한 고냥이의 [ 알코올 저장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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