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 댁에 방문하며 들고 온 전통주들. 병영소주, 죽력고, 송화 백일주.
이번에 출전할 선수는 송명섭 명인의 죽력고(竹瀝膏).
죽력고는 그야말로 대나무를 잘라 밀봉한 항아리에서 푹 고아서 뽑아낸 진액을 이용해 만드는 술이다. 죽력에 대잎, 솔잎, 생강, 석창포, 계심 등을 담근 후 술을 증류할 때 소줏고리 중간에 넣어 풍미를 추출한다.
죽력고는 육당 최남선이 이강주, 관서 감홍로와 함께 조선 3대 명주로 꼽았던 술이다. 육당이 술 전문가는 아니지만, 어쨌거나 그만큼 조선시대에 이름을 떨친 술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빼어난 약성으로도 유명한데, 모진 고문을 받고 기력이 쇠한 녹두장군 전봉준이 죽력고 석 잔을 마시고 기력을 회복해 압송 내내 꼿꼿한 자세를 유지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스윙탑 병에는 주세 납세필증이 붙어 있다. 솔직히... 죽력고에서 딱 한 가지 아쉬운 점이 바로 병이다. 품격에 어울리는 병에 담긴다면 더욱 사랑받을 술인데... 명인께서는 내용물에만 자부심이 있으실 뿐, 담는 그릇에는 그닥 관심이 없으신 듯하다. 비싼 병이 아니더라도 죽력고만의 특징을 외관에서부터 보여줄 수 있는 디자인의 병과 레이블이 필요한데.
원료는 밀누룩과 쌀로 담근 술과 죽력(에 담근 약재들). 알코올 함량은 32%. 소줏고리로 내리는 술이므로 물을 타지 않은 원주의 도수다. 하지만 32%로 도수가 표준화되어 있다는 것은 약간의 가수를 통해 조절을 하시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딱 32%가 되는 순간까지 증류를 한다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일 테니. 혹은 주세법상 표기된 알코올 도수의 ±0.5%까지는 오차가 허용되므로, 그 수준에서 커팅한 술을 블렌딩 하시는 걸까.
또 하나의 미스터리. 죽력고는 증류한 뒤에 약재를 침출하는 것이 아니라, 진을 증류할 때처럼 소줏고리의 중간에 허브를 올려놓아 증기로 풍미를 뽑아낸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컬러는 추출되지 않기 때문에 완성된 술의 색은 투명해야 한다. 그런데 실제 죽력고의 컬러는 레이블 아래 살짝 보이는 것처럼 밝은 앰버 골드 빛을 띤다. 갈색의 침전물 또한 상당히 보이고.
왜 그런지에 대해서는 술을 만드시는 송명섭 명인조차 명확히 답하시진 못한다고 한다. 다만, 소줏고리로 술을 내리는 중에 가열된 약재 성분들이 액화된 술에 튀어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싶다는 추측을 할 뿐.
태인양조장, 죽력고(竹瀝膏)
코를 대면 상쾌한 대나무와 은은한 계피 향이 구수한 곡주의 향과 어우러져 복합적인 풍미를 드러낸다. 입에 넣으면 생각보다 훨씬 부드럽고 우아한 맛. 12년 전쯤 처음 맛을 봤을 때에는 어택이 상당했다는 기억인데, 경험이 쌓인 것인지 지금은 훨씬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입에 머금으면 다양한 약재의 다층적인 풍미가 입안을 가득 채우지만, 지나친 풍만함이나 끈적이는 느낌 없이 깔끔하게 술술 넘어간다. 진한 풍미에 깔끔한 여운이 매력적인 술.
식사와 함께 즐겨도 괜찮겠지만 전통 떡이나 한과, 약식 등 간단한 다과와 함께 천천히 두어 잔 정도 마시면 더욱 좋을 것 같다.
하지만 된장으로 구수하게 끓인 게 찌개, 미나리를 넣어 가볍게 무친 꼬막과도 아주 잘 어울렸다. 그저, 병 디자인만 좀 바꿔 주시길 바랄 뿐.
참고로 온라인에서도 쉽게 구매할 수 있는 술이지만, 정읍을 지난 일이 있다면 태인 터미널 근처의 태인 마트에 들러 보시라. 온라인 판매가보다 1~1.5만 원 정도 저렴한 가격에 구매할 수 있다. 근처에 있는 태인 양조장에 들러도 좋겠지만, 양조장에서 시음이나 구매는 할 수 없으니 주의.
개인 척한 고냥이의 [ 알코올 저장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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