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그로(Anne Gros)!
부르고뉴를 대표하는 여성 와인메이커 중 한 명이자 포스트 르루아(post Leroy)의 선두주자로 손꼽히는 그녀를 서울에서 다시 만나게 되다니... 감개무량.
2007년, 벌써 10년 전의 사진이다. 부르고뉴에서 와인 투어를 할 때 그녀의 집 게스트하우스(la Colombiere)에 묵었다. 떠나기 직전에 셀러를 잠깐 구경시켜 줬는데 그녀의 성격이 그대로 반영된 듯 천장부터 바닥까지 먼지 하나 없이 깔끔했다. 2005년 빈티지가 출시되던 시기였는데 리시부르(Richebourg)는 이미 sold out. 2004빈도 sold out... 끌로 부조(Clos Vougeot) 조차 '05빈은 없어서 '04빈 한 병 사서 나왔던 기억이 있다. 그땐 와인을 막 즐기기 시작했을 때라 잘 몰랐지만 그녀의 위대함을 어렴풋하게 느꼈달까.
그나저나 2007년은 수확이 빨라 8월 말이었는데도 곧 수확이 시작된다며 '일손도 없는데 포도나 따고 가라'던 안 그로 여사의 농담이 떠오른다. 만약 지금이라면 이후 일정을 캔슬하고 포도를 땄을 지도 모르겠다ㅎㅎ
흠흠,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그녀의 와인들. 좌측 블루/화이트 레이블은 부르고뉴의 Domaine Anne Gros에서, 우측 오렌지색 레이블은 랑그독(Languedoc) 미네르부아의 Domaine Anne Gros et Jean-Paul Tollot에서 만드는 와인이다. 장-폴 똘로는 안 그로의 남편으로 그의 가문 역시 부르고뉴의 유력 와인 생산자. 둘이 의기투합하여 미네르부아(Minervois)에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지 벌써 10여 년이 흘렀다.
나중에 식사를 하며 그녀가 미네르부아를 선택한 이유를 들어보았다. 그녀는 레드 와인을 만들고 싶었고 규제가 적은 랑그독 지역을 '기회의 땅'으로 묘사했다. 프로방스(Provence)도 후보군 중 하나였지만 너무 멀어서(교통이 안 좋아서) 포기했다고. 상대적으로 미네르부아는 부르고뉴에서 TGV로 갈 수 있기 때문에 비교적 왕래가 쉽다. 처음엔 부르고뉴와 미네르부아의 두 도멘을 왕복하며 관리하는 게 힘들었지만 10년의 세월이 지나며 어느 정도 세팅이 되어 이제 안정이 되었다. 아들이 미네르부아에 상주하고 미네르부아 담당 와인메이커와도 공감을 이루었단다. 딸은 부르고뉴의 까브에서 함께 일하고 있다.
안 그로 여사는 오후 늦게 한국에 도착하는 일정. 한국에서 그녀의 첫 식사였다. 이런 사적인 자리에 참석하게 되다니... 비행기 연착으로 15분 정도 늦는 동안 와인 사진도 찍고 참석자들(다 아시는 분들.. ㅎㅎ)과 담소도 나누며 기대감을 증폭시켰다.
와인 상태는 이미 체크 완료.
요 부르고뉴 샤르도네는 매년 1천 병 정도 밖에 생산하지 않는 나름 레어템이다. 20년 전쯤 0.16ha 포도밭에 식재되어 있던 가메인지 피노인지를 걷어 내고 샤르도네를 심었단다. 그러니 포도밭의 수령은 대략 20년인 셈.
드디어 그로 여사 도착.
지금 막 도착해서인지 약간은 피곤한 인상. 하지만 음식과 와인을 즐기며 담소를 나누자 금새 적극적이고 위트 있는 모습이 드러났다. 역시 부르고뉴의 여장부. 2007년 처음 보았을 때, 그리고 2012년 그랑 주르 드 부르고뉴(Grands Jours de Bourgogne)에서 잠깐 마주쳤을 때와 비교하면 참... 감회가 새롭다.
완벽한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짝지가 옆에 앉아서 말동무도 해 주고 통역도 해 줘서 더욱 좋았던 듯 ㅎㅎㅎㅎ 비노쿠스 최신덕 대표님 휴식 잼 ㅋㅋㅋ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안 그로.. 그녀의 리즈 시절.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긴데 소싯적엔 인기가 대단하셨다고^^
도멘 안 그로는 부르고뉴, 특히 본 로마네(Vosne-Romanee)의 유명한 와인 가문 Gros family의 일원이다. 그녀의 아버지 프랑스와 그로(Francois Gros)는 1970년까지 형 장 그로(Jean Gros)와 함께 일하다가 1971년 3ha의 포도밭을 가지고 독립하여 Domaine Francois Gros의 이름으로 와인을 판매했다. 그러다가 1978년 건강 이상으로 와인을 벌크로 넘길 수 밖에 없었고 네고시앙도 운영할 수 없게 되었다. 1988년 프랑수아의 무남독녀 안 그로가 합류하면서 도멘 이름을 Domaine Anne et Francois Gros로 변경했고 1995년에 비로소 Domaine Anne Gros가 되었다. 처음 물려받은 포도밭은 6.5ha인데 아마 현재는 확장되었을 것 같다. (에세조 등 대여했던 밭을 돌려받은 것도 있다는데 이런 것도 초기 면적 안에 포함되는지 정확하지 않다.) 자세한 내용은 홈페이지를 참고. 최근 업데이트는 별로 안 하시는 듯^^
현재 운영되는 네 개의 그로 패밀리 도멘 중 나머지 셋은 미셀 그로(Domaine Michel Gros), 그로 프레르 에 셀(Domaine Gros Frère et Soeur), AF 그로(Domaine AF Gros). 모두 장 그로의 자녀들, 그러니까 그녀의 사촌들이다. 다른 도멘들도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고 있지만 특히 그녀의 도멘은 독보적이다. 앞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그녀의 리시부르(Richebourg)는 엄청난 가격에도 구하기가 쉽지 않으며 나머지 와인들도 그 가치(=가격)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가히 포스트 르루아의 선두주자라는 평이 빈말은 아닌 듯. 그로 패밀리 가계도는 와인21에 기고한 아티클 참고.
먼저 식전주로 샤르도네.
Domaine Anne Gros, Bourgogne Chardonnay 2014 / 도멘 안 그로 부르고뉴 샤르도네
반짝이는 옅은 금빛. 가벼운 토스티 오크와 너티한 향기, 레몬과 핵과, 생강 힌트. 입에 넣으면 산미가 너무나 잘 살아있어 온 몸의 에너지를 끌어올리는 느낌이다. 군더더기 없는 매끈한 질감에 청명한 여운이 대단히 매력적. 이게 부르고뉴 레지오날이라니 믿을 수가 없다. 시간이 지나 온도가 살짝 오르자 파인애플 등 열대과일과 잘 익은 사과, 살구 등 과일향이 화사하게 피어올랐다. 또다른 매력. 프렌치 오크에서 14개월 정도 리 숙성을 했다고.
최근 와인북카페의 대표 메뉴 중 하나, 기장 멸치 튀김과 함께.
샤르도네와 안성맞춤^^ 레몬이 필요없을 정도랄까...
두 번째는 부르고뉴의 레드 와인.
Anne Gros, Savigny-les-Beaune Premier Cru Les Lavieres 2012 / 도멘 안 그로 사비니-레-본 프르미어 크뤼 레 라비에르 2012
진하게 느껴지는 오크 뉘앙스에 삼나무, 체리와 자두, 커런트, 감초, 가벼운 농가 힌트와 유산향. 입에 넣으면 드라이한 인상에 약간은 강건한 느낌이지만 질가 만큼은 매끈하다. 시간이 지나며 부르고뉴 특유의 붉은 과일 풍미가 영롱하게 드러난다. 초반의 묵직한 느낌과는 다른, 귀엽고 은근하게 느껴지는 체리 딸기 뉘앙스. 가볍지만 존재감있게 더해지는 스파이스, 인삼 힌트. 미디엄풀 바디에 와이트와 마찬가지로 산미가 인상적이다.
레이블에 'Domaine'이 빠진 걸로 보아 아마도 네고시앙 성격으로 만드는 와인인 듯 하다. (그녀의 홈페이지에도 소개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안 그로의 성향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훌륭한 와인. 쉽게 마셔버릴 수 없어 1시간 이상 천천히 마셨는데 마지막까지 훌륭했다. 남향 밭으로 완숙된 과일 풍미가 드러나며 피니시 또한 긴 편이라고.
파프리카를 참치와 빵가루 등으로 채운 요리. 크리스피한 질감에 참치의 담백함과 파프리카의 매콤함이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그로 여사는 맛을 보더니 다음에 나올 미네르부아 와인과 곁들이면 잘 어울릴 것 같다고. 그래서 하나씩 남겨서 매칭해 봤는데 실제로 굳 매칭이었음^^;;
그리고 드디어 미네르부아 와인들.
Domaine Anne Gros et Jean-Paul Tollot LA 50/50 (2012) / 도멘 안 그로 에 장-뽈 똘로 라 50 (2012빈티지)
화한 로즈마리, 스윗 스파이스와 검붉은 베리 향기가 매력적인 첫 인상을 형성한다. 입에 넣으면 부드러운 질감에 둥근 타닌. 시간이 지날 수록 라즈베리, 딸기 등 붉은 베리 풍미가 두드러진다. 더해지는 초컬릿, 모카, 시나몬 캔디, 정향... 피니시의 여운이 너무나 편안하다. 오래 전 처음 마셨을 때도 좋다고 생각했었지만, 이렇게 좋았었구나! 그르나슈(Grenache), 시라(Syrah), 30-50년 수령의 까리냥(Carignan)을 1/3씩 블렌딩했다. 이름이 'La 50/50'인 이유는 안 그로와 장-뽈 똘로가 50%씩 지분을 투자했기 때문이라고^^;;
6-7년전 쯤 La 50/50과 Les Fontanilles 2008빈을 마신 적이 있었는데 그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랄까. 시음 노트를 찾아보니 확실이 현재가 더 정제되고 편안한 느낌. 숙성의 힘일까, 혹은 몇 년 새 부르고뉴의 감성이 랑그독의 지역성에 더해진 것일까.
냉이를 튀겨서 올린 오레키에테(Orecchiette). 오레키에테는 '작은 귀'라는 의미의 파스타. 와인북카페의 주방에서 직접 빚은 수제 파스타다. 냉이튀김을 올려 봄내음이 물씬 풍긴다. 다음 날 가서 또 먹었는데 여전히 맛있었다ㅎㅎㅎ
처음 마신 LA 50/50을 포함해 이날 마신 도멘 안 그로 & 장-뽈 톨로의 다섯 와인들.
Domaine Anne Gros et Jean-Paul Tollot L'O DE LA VIE Syrah 2011 / 도멘 안 그로 에 장-뽈 똘로 로 데 라 비 2011
시라 100%로 양조하는 와인으로 2011년이 첫 빈티지다. 동물성 힌트에 칡, 도라지 같은 뿌리 뉘앙스의 첫 느낌. 하지만 입에서는 블루베리, 블랙베리, 딸기, 체리, 등 검붉은 베리 풍미가 지배적이며 약재 힌트와 명확하지만 과하지 않은 스파이스가 더해진다. L'O de La Vie는 생명수라는 의미. 사용되는 시라가 재배되는 포도밭의 이름이 'Ruisseau de la Vie(생명의 계곡)'이라는 것에서 착안했다고. 아직 수령은 어리지만 그 표현력은 충분히 가늠할 수 있는 좋은 와인이었음.
Domaine Anne Gros et Jean-Paul Tollot LES FONTANILLES Minervois 2013 / 도멘 안 그로 에 장-뽈 똘로 레 폰타니으 미네르부아 2013
알싸한 미네랄, 달콤한 스파이스, 영롱한 딸기, 체리 아로마가 만드는 밝은 첫 인상. 은은한 허브에 자두, 검붉은 베리 풍미, 미디엄풀 바디에 남부 론과 상당히 유사한 스타일로 상당히 편안하다. 그로 여사는 '아직 어리다'며 몇 년 더 지나면 진가를 드러낼 것이라고. 생소(Cinsault), 그르나슈, 시라, 카리냥을 블렌딩했으며 시라와 그르나슈만 오크 숙성했다. 그르나슈는 산화에 민감하고 생소는 그 표현력이 충분히 좋아서 오크 숙성을 하지 않았다고(물론 비용 이슈도 고려하여).
2013년은 수확이 늦은 해로 미네르부아는 9월 말쯤, 부르고뉴는 10월 중순 쯤에 수확을 진행했단다. 전반적으로 영롱한 스타일의 와인이 되었다고.
Domaine Anne Gros et Jean-Paul Tollot LES CARRETALS Minervois 2011 / 도멘 안 그로 에 장-뽈 똘로 레 카레탈 미네르부아 2011
후추와 약간의 동물성이 곁들여진 검은 베리 향이 아주 매력적으로 드러난다. 더해지는 허브, 감초, 모카 스모키 힌트. 입에서도 밀도 높은 블랙 베리와 프룬 등 검은 과일 풍미가 매끈한 질감을 타고 기분 좋게 전해진다. 풀 바디에 양질의 오크 뉘앙스, 두툼하지만 jammy하지 않은 훌륭한 주질, 적절한 산도가 길게 끌어주는 깔끔한 여운. 1909년 식재된 까리냥 100%로 양조한 빼어난 와인이다.
사실은 까리냥이 심어진 포도밭에 약간의 그르나슈가 필드 블렌딩 되어 있단다. 그래서 까리냥 100%인 듯, 100%아닌, 100% 같은...
미네르부아 와인들과 함게 즐긴 빠께리,
피에몬테 식 우설 요리,
채끝 등심 스테이크.
와인북카페 대표님이 개인 소장하신 도멘 안 그로의 와인들... 싸인을 받기 위해 꺼내 오신 건데 그 중에 한 병 얻어 마심ㅋㅋㅋ 내신 분은 비노쿠스 최대표님인 건 안 비밀 ㅋㅋㅋ
Domaine Anne Gros, Chambolle-Musigny La Combe D'Orveau 2014
생각보다 화한 허브, 은은한 장미꽃, 영롱한 미네랄, 붉은 베리와 체리 아로마. 미네르부아의 와인들에 비해 확실히 여리고 섬세하지만 밀도로는 뒤지지 않는 듯. 미디엄 바디에 역시나 훌륭한 산미, 맑고 순수한 느낌이 긴 여운을 선사한다. 마지막이라 상당히 마신 상태였는데도 적지 않은 감흥.
참고로 안 그로는 양조 시 완전히 제경을 한다. 줄기를 넣지 않는 이유는 포도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을 다 얻기 때문에 굳이 줄기를 넣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고.
참석하신 분이 직접 구워 오신 브라우니. 단맛과 풍미의 밸런스가 완벽해서 마지막으로 제격이었음. 에스프레소 한 잔이 간절했달까.
그로 여사는 직전 방문지인 중국에서 디저트(스위티)가 없어 너무 힘들었다며 브라우니에 깊은 만족감을 표현하심ㅋㅋㅋ 특히 앞서 마신 라 시오드와 너무 잘 어울릴 것 같다고... 끝까지 와인 생각ㅎㅎㅎ
와인 북카페의 멤버들과 함께, 처음 배운 작은 하트를 시전하시며 즐거워하는.
큰 하트는 더 크게 즐거워하심 ㅋㅋㅋ
그녀의 포스는 여전했지만 쌓인 연륜 만큼 더욱 깊어진 느낌이랄까.
부디 또 만날 수 있기를. 부르고뉴에서든 한국에서든.
20170313 @ 와인북카페(논현동)
개인 척한 고냥이의 [와인저장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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