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람브루스코(Lambrusco)를 마십니다.
다떼리노 토마토소스로 에그인헬을 만들었는데 곁들이 와인을 찾다가 와인랙 구석에 박혀 있던 이 녀석이 눈에 띄었거든요.
람브루스코는 이탈리아 에밀리아 로마냐(Emilia-Romagna) 지역에서 생산하는 약발포성 와인입니다. 에밀리아 로마냐는 파르미자노 레자노 및 그라노 파다노 치즈, 프로슈토 파르마, 장기 숙성 발사믹 식초 등 고급 식재료와 미식의 고장으로 유명한데, 그 지역 사람들이 다양한 음식들과 일상적으로 마시는 와인이 바로 람부르스코라고 하네요. 1970-80년대 미국 시장에서도 한 해 몇백만 상자가 팔려나갈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지만, 저급한 람부르스코가 범람하면서 콜라 같은 와인 취급을 받는 상황이 발생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지금까지도 그 인기를 회복하지 못하고 많은 애호가들이 외면하는 와인이 되었지만, 최근에는 일부 생산자들이 괄목상대할 만한 와인을 만들고 있습니다.
사실 람브루스코는 은근한 꽃과 가벼운 스파이스, 포도 본연의 맛이 명확하게 드러나지만 알코올 함량이 낮고 풍미 또한 강하지 않으며, 가벼운 거품이 있기 때문에 음식과 무난하게 어우러지면서 입안을 깔끔하게 정리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본고장의 사람들이 이 와인을 즐기는 방식이죠.
람브루스코는 같은 이름의 적포도로 만들어지는데, 람브루스코에도 다양한 품종이 있습니다. 람부르스코 그라스파로싸(Lambrusco Grasparossa), 람브루스코 마에스트리(Lambrusco Maestri), 람부르스코 마라니(Lambrusco Marani), 람브루스코 몬테리코(Lambrusco Montericco), 람브루스코 살라미노(Lambrusco Salamino), 람브루스코 소르바라(Lambrusco Sorbara) 등이 대표적입니다. 각각의 품종을 개별적으로 사용하기보다는 블렌딩해서 만드는 경우가 많으며, 람브루스코 품종 외에도 안셀로타(Ancellotta), 마르제미노(Marzemino) 등 허용된 품종을 최대 15%까지 블렌딩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아래 소개하는 개별 DOC 별로 규정의 차이가 있습니다.
람브루스코는 드라이(secco), 세미 스위트(amabile), 스위트(dolce) 타입으로 나뉘며, 주로 탱크 방식으로 만든 약발포성(frizzante) 레드 와인이 다수를 차지하지만 로제나 화이트로도 만들 수 있습니다.람브루스코는 다양한 DOC, 혹은 에밀리아 IGT로 생산하는데 그중 특히 높은 품질로 평가받는 것은 람브루스코 디 소르바라, 람브루스코 그라스파로싸 디 카스텔베르토, 람브루스코 살라미노 디 산타 크로체입니다. 이 포스팅의 와인도 람브루스코 디 소르바라이고요, 예전에 시음회와 세미나에서 인상에 남았던 위 사진의 람브루스코들 또한 위 DOC에 해당하는 와인들이었네요.
- 람브루스코 디 소르바라(Lambrusco di Sorbara) :
소르바라 품종을 60% 이상 사용해야 하며, 살라미노 품종을 최대 40%까지 사용할 수 있습니다. 소르바라는 람브루스코 품종 중 가장 향긋하며 품질이 좋은 것으로 평가됩니다. 살라미노 품종은 소르바라와 유사하지만 컬러의 밀도와 바디감이 살짝 낮다고 하네요. 두 품종 모두 신맛이 잘 살아있어 생기 넘치는 와인을 만들 수 있습니다. - 람브루스코 살라미노 디 산타크로체(Lambrusco Salamino di Santa Croce) :
포도송이의 모양이 살라미 소세지를 닮은 것에서 이름이 유래했다고 합니다. 살라미노 품종을 90% 이상 사용해야 하며 컬러가 옅으며 가볍고 섬세한 드라이 혹은 세미 스위트 타입 와인을 만듭니다. - 람브루스코 그라스파로싸 디 카스텔베르토(Lambrusco Grasparossa di Castelverto) :
가장 작은 DOC로 그라스파로싸 품종을 85% 이상 사용해야 합니다. 그라스파로싸 품종은 짙은 보랏빛 컬러에 람브루스코 중 가장 타닌이 많은 품종으로, 가장 바디감이 좋고 타닉한 람부르스코를 만듭니다. 위 와인의 시음기에 '와일드하다'라는 표현이 있는 이유가 있었네요. 위 사진은 세미 스위트(amabile) 타입이지만, 주로 드라이 타입이 많다고 하네요. - 람브루스코 만토바노(Lambrusco Mantovano) :
이 DOC만 유일하게 에밀리아 로마냐가 아닌 롬바르디아(Lombardia)에 있습니다. 주로 드라이 타입 와인을 만듭니다. - 람부르스코 레자노(Lambrusco Reggiano) :
일종의 광역 DOC인 레자노의 이름을 달고 나오는 람브루스코입니다. 컬러가 진한 드라이 타입, 연한 컬러의 달콤한 타입 등 다양한 스타일을 생산하며 수출량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람브루스코가 아닐까 싶은 메디치 에르메테 콘체르토(Medici Ermete Concerto)가 바로 람브루스코 레자노입니다.
기포에 의해 코르크가 튀어나가지 않도록 끈으로 단단히 묶어 놓았습니다. 약발포성 와인이기 때문에 샴페인처럼 철제 뮈즐레를 쓰지는 않았나 보네요.
백 레이블을 보니 빈티지가 명기된 드라이 타입 프리잔테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보틀 페르멘테이션을 한 람브루스코네요.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람브루스코는 탱크 방식으로 2차 발효를 합니다. 탱크 안에서 기포를 만들면 과일 풍미를 잘 살려주는 데다 가격도 저렴하다는 장점이 있죠. 그런데 이 와인은 병입 후 2차 발효를 통해 기포를 만들었습니다. 병입 2차 발효를 통해 기포를 만들면 탱크 방식에 비해 좀 더 섬세하고 부드러운 기포를 만들 수 있습니다.
클레토 치아를리(Cleto Chiarli)는 1860년부터 이어지고 있는 키아를리 가문에서 2000년 새롭게 설립한 와이너리로, 150년 이상 병입 2차 발효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고 합니다. 다양한 와인과 발사믹 식초도 만드는 것 같지만 주력은 역시 람브루스코이고요, 클레토 치아를리는 퀄리티 람브루스코 생산에 더욱 집중하는 와이너리로 보입니다.
2018년 와인 스펙테이터로부터 90점을 받으며 프리잔테 스타일로는 유일하게 연말 100대 와인에 선정된 것이 그 방증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개인적으로도 이 집의 람브루스코는 꾸준히 마시고 싶습니다.
권장 음용 온도는 섭씨 12 정도에요. 간편하게 칠링하려고 아이스 슬리브를 사용했어요. 아이스 슬리브를 끼워 냉장고에 넣어두었죠. 한여름이 아니라면 30분 정도면 마실만 하게 칠링됩니다.
코르크의 모양이 독특합니다. 질감은 스파클링 와인 코르크와 유사한데, 특유의 버섯머리 대신 못 같은 머리만 있어요. 그리고 코르크 스크류를 사용해 열어야 합니다. 기압이 높지 않아 확 튀어나가진 않으니 안심해도 됩니다.
Cleto Chiarli, Lambrusco del Fondatore 2016 Lambrusco di Sorbara
클레토 치아를리 람브루스코 델 폰다토레 2016 람브루스코 디 소르바라
자몽 껍질을 연상시키는 다홍빛 진하게 감도는 반짝이는 구리색. 잔잔한 기포가 느리지만 꾸준히 올라옵니다. 석류 등 작은 붉은 베리, 레드 체리 아로마에 붉은 자두 껍질 같은 뉘앙스와 시원한 허브와 스파이스 힌트가 살짝 섞이네요. 입에 넣으면 섬세하고 부드러운 기포. 자몽 속껍질 같은 쌉쌀한 드라이함과 살짝 드러나는 잔당감이 균형을 맞추며 시간이 갈수록 방순한 딸기 풍미로 수렴하는 느낌입니다. 알코올 함량(11.5%)도 낮아 다양한 음식과 함께 벌컥벌컥 마셔도 부담 없을 와인이에요.
복잡하지 않은, 편안한 와인이지만 의외의 즐거움을 줍니다. 너무 심각하지 않게 접근한다면 좋은 사람들과 다양한 음식을 즐기며 맛있게 마실 수 있을 것 같아요. 재구매 의사 확실합니다. 만나기 힘들다는 게 문제지만.
요즘은 불멍보다 버블멍이 대세...^^
개인 척한 고냥이의 [ 알코올 저장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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